고대사

앙투안 드루오 백작 — 나폴레옹이 신뢰한 '대포의 현자'

앙투안 드루오 백작(1774~1847)

1774년 1월 11일 프랑스 낭시(Nancy)에서 태어나 1847년 3월 24일 같은 곳에서 생을 마감한 앙투안 드루오(Antoine Drouot)는 나폴레옹 시대 프랑스 포병을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제과점 주인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1793년 샬롱쉬르마른(Châlons) 포병학교에 입교하며 군 경력을 시작했습니다.

앙투안 드루오 백작 — 나폴레옹이 신뢰한  대포의 현자
드루오의 초상화

혁명전쟁기의 군 경력

1796년 2월 대위로 진급한 드루오는 이탈리아 방면군으로 전속되었으며, 1799년 6월 18일부터 20일까지 벌어진 트레비아(Trebbia) 전투에서 프랑스군의 후퇴를 지원했습니다. 이후 1800년 호엔린덴(Hohenlinden) 전투에도 참전했습니다. 툴론으로 파견되어 상륙 포병 지휘관으로 복무하던 중에는 트라팔가르 해전의 참사를 간신히 피할 수 있었습니다.

대육군(Grande Armée) 총참모부에서 대대장으로 임명된 뒤에는 모베주(Maubeuge)와 샤르르빌(Charleville) 조병창 감독관을 맡았고, 1808년에는 스페인 방면군 포병 야전창을 지휘하기 위해 파견되었습니다.

바그람에서 워털루까지

1809년 근위 보행포병 소령 겸 근위 포병 야전창장으로 임명된 그는 바그람(Wagram) 전투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백 문의 대포 화망으로 오스트리아군을 압도했던 것입니다. 이 공로로 근위 보행포병 연대장(colonel-major)으로 승진했고, 1810년에는 제국 남작 작위를 받았습니다.

드루오는 근위대와 함께 러시아 원정에 참가하여 모스크바 강(Moskva) 전투의 승리를 포병력으로 확보했으며, 후퇴 과정에서 포병 자재 대부분을 구해냈습니다. 1813년 1월 1일 준장으로 진급하고 황제 부관(aide-de-camp)이 되었으며, 같은 해 9월에는 사단장, 10월에는 제국 백작에 올랐습니다.

1813년 캠페인에서 그의 포병은 바이센펠스(Weissenfels), 뤼첸(Lützen), 바우첸(Bautzen)에서 결정적 역할을 했고, 하나우(Hanau) 전투에서는 후퇴하는 프랑스군을 구원했습니다. 1814년 프랑스 방어전 기간 동안 드루오는 라 로티에르(La Rothière), 샹포베르(Champaubert), 보샹(Vauchamps), 모르망(Mormant), 크라온(Craonne), 라옹(Laon) 등 어디서나 활약하며 프랑스군의 중추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앙투안 드루오 백작 — 나폴레옹이 신뢰한  대포의 현자
바그람 전투의 드루오

엘바 섬과 백일천하

나폴레옹이 퐁텐블로(Fontainebleau)에서 퇴위할 당시 드루오는 그곳에 함께 있었고, 이후 황제를 따라 엘바 섬으로 건너가 섬 총독을 맡았습니다. 백일천하(Hundred Days)의 모험에 대해서는 반대 입장이었지만, 그는 다시 한번 황제 곁에 서서 워털루(Waterloo) 전투에서 근위대를 지휘하며 영웅적으로 싸웠습니다.

명예로운 말년

전쟁이 끝난 후 반역죄로 고발된 드루오는 스스로 재판에 출두하여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흥미롭게도 루이 18세는 그를 접견하며 보나파르트에 대한 충성심을 높이 평가한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드루오는 군 복귀를 거부했고, 이후 왕정 복고 정부와 여러 차례 정권이 제안한 모든 직위와 영예를 사양하며 은거 생활을 보냈습니다. 그의 이름은 오늘날 개선문(Arc de Triomphe)에 새겨져 그의 공헌을 기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