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줌비 두스 팔마레스: 브라질 노예 저항의 영웅

줌비 두스 팔마레스(Zumbi dos Palmares)는 브라질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위대한 인물입니다. 그는 브라질 역사상 가장 크고 가장 오래 지속된 팔마레스 킬롬부(Quilombo dos Palmares)의 지도자 중 한 명으로, 1678년 킬롬부의 지도권을 잡은 뒤 거의 20년에 걸쳐 포르투갈의 공격에 맞서 싸웠습니다.

1695년 11월 20일, 은신처가 밀고되면서 그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지만, 오늘날 줌비는 브라질에서 흑인과 아프리카인들이 노예제에 맞서 싸운 투쟁의 가장 큰 상징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그의 유산은 지금까지도 브라질 사회에 존재하는 인종차별에 맞서는 흑인들의 투쟁을 상징하는 데 활용되고 있습니다.

팔마레스 킬롬부란 무엇인가?

줌비의 삶을 팔마레스 킬롬부와 분리해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는 이 킬롬부의 지도자였고, 결국 이곳을 지키다가 목숨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팔마레스 킬롬부는 16세기 말에 등장했으며, 이름은 이 공동체가 자라난 곳인 세라 다 바리가(Serra da Barriga)에 많던 야자수에서 유래했습니다.

팔마레스는 탈출한 노예들이 만든 작은 마을인 '모캄부(mocambo)'들이 모여 이루어진 연합체였습니다. 약 18개의 모캄부가 오늘날의 알라고아스와 페르남부쿠 주에 해당하는 광대한 지역에 흩어져 있었으며, 중심지인 세르카 헤알 두 마카코(Cerca Real do Macaco), 즉 '모캄부 두 마카코'에는 최대 6천 명이 거주했습니다. 팔마레스 전체의 인구는 최대 2만 명에 달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팔마레스는 처음에는 페르남부쿠의 제당소에서 도망친 수십 명의 노예들로 시작된 것으로 여겨집니다. 시간이 지나며 공동체가 성장하면서 더 많은 노예들이 탈출해 이곳에 정착했습니다. 존속 기간 내내 팔마레스는 네덜란드와 포르투갈이 보낸 원정군의 공격을 격퇴하며 버텨냈습니다.

역사가들은 관련 사료가 부족해 팔마레스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많지 않습니다. 특히 기존의 모든 사료가 유럽인들이 작성한 것이라는 점이 문제를 더합니다. 따라서 이 문서들로는 팔마레스 역사의 극히 일부만 재구성할 수 있을 뿐입니다.

1630년대부터 북동부에서 네덜란드와 포르투갈 간의 충돌이 벌어지면서 팔마레스는 급격히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포르투갈이 지역을 탈환한 뒤에는 원정이 점점 더 자주 조직되었고, 킬롬부의 쇠퇴는 1680년대에 시작되었습니다.

팔마레스에 종말을 가져온 것은 도밍고스 조르제 벨류(Domingos Jorge Velho)가 이끄는 원정이었습니다. 그는 팔마레스를 파괴하기 위해 고용되었으며, 대가로 포획한 흑인 일부를 소유할 권리와 세라 다 바리가 지역의 토지를 받았습니다. 모캄부 두 마카코는 결국 1694년 파괴되었고, 생존자들은 도망쳐 18세기 초까지 저항을 이어갔습니다.

줌비 두스 팔마레스는 누구인가?

줌비 두스 팔마레스: 브라질 노예 저항의 영웅

팔마레스 킬롬부의 핵심 인물은 단연 줌비입니다. 그는 킬롬부의 지도자 중 한 명으로 이름을 남겼으며, 결국 그 삶을 목숨으로 치렀습니다. 줌비의 삶에 대해 알려진 것은 매우 적고, 한때 확실한 진실로 여겨졌던 몇몇 결론들은 현재 일부 역사가들에 의해 의문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통용되어 온 이야기에 따르면, 줌비는 어린 시절 팔마레스에 대한 공격 중 납치되어 한 신부에게 맡겨졌고, 신부는 그에게 '프란시스쿠'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글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이후 청소년기에 도망쳐 팔마레스로 돌아왔고, 그곳에서 지도자의 자리에 올랐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설은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최근 의문을 받고 있습니다.

논란이 되는 이유는 이 이야기를 담은 저술의 저자가 본인만 열람할 수 있었던 편지들을 사용했고, 이를 다른 사람에게 공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한편 포르투갈 국왕 페드루 2세(Dom Pedro II)는 줌비에게 포르투갈의 신민으로 살기를 받아들이면 사면하겠다는 제안을 담은 편지를 남겼는데, 이 편지에는 줌비의 아내와 자녀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역사가들은 그가 실제로 아내와 자녀를 두었는지 단언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줌비'는 이름인가, 칭호인가?

또 하나의 논쟁거리는 줌비가 실존 인물의 이름이었는지, 아니면 일종의 칭호였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일부 역사가들은 양쪽 가능성을 모두 인정합니다. 즉, 1695년 저항하다 죽은 지도자 줌비는 실존했지만, '줌비'라는 용어 자체는 팔마레스에서 사용되던 직함이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역사가이자 연구자인 펠리피 아기아르 다마스세누(Felipe Aguiar Damasceno)는 1640년대 네덜란드 문서에 팔마레스의 한 권위자가 '담비즈(Dambij)'로 기록되어 있음을 지적했습니다|1|. '담비즈'와 '줌비'의 유사성은 이 용어가 권력의 위치를 나타내는 칭호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합니다.

확실한 사실 중 하나는 1678년 줌비가 당시 킬롬부의 지도자였던 강가 줌바(Ganga Zumba)와 갈등을 빚었다는 점입니다. 원인은 포르투갈 당국이 제안한 평화 조건 때문이었습니다. 이 제안에 따르면 강가 줌바는 포르투갈이 지정한 마을로 이주하고, 팔마레스에서 태어난 흑인들은 자유를 누리지만, 도망쳐 온 노예들은 다시 노예 상태로 돌려보내져야 했습니다.

강가 줌바가 이 제안을 받아들인 것은 포르투갈 측의 협박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친척 일부가 납치되어 교섭 카드로 사용되었고, 결국 그는 평화 제안을 수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결정은 팔마레스를 분열시켰고, 일부 주민들이 강가 줌바에게 반발했습니다 — 줌비 자신도 그중 하나였습니다.

결국 강가 줌바는 살해당했습니다 — 포르투갈인에 의해서인지, 아니면 킬롬부 주민들에 의해서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이후 줌비가 새 지도자가 되었고, 강가 줌바의 형제인 가나 조나(Gana Zona)와의 갈등 끝에 권력을 굳혔습니다. 줌비는 팔마레스의 마지막 시기 동안 저항을 이끌었습니다.

줌비의 죽음

도밍고스 조르제 벨류의 원정이 모캄부 두 마카코를 파괴한 후, 줌비와 생존자들은 세라 두이스 이르마엉스(Serra Dois Irmãos)의 숲속으로 숨어 들어갔습니다. 그들은 1년 반 동안 깊은 산속에서 저항을 이어갔으며, 이는 줌비가 1694년 자살했다는 통설을 깨뜨린 새로운 연구들을 통해 확인된 사실입니다.

줌비는 1695년 11월 20일 살해당했습니다. 그의 동료 안토니우 소아레스(Antônio Soares)가 고문 끝에 은신처를 밀고한 것이 원인이었습니다. 반데이란테(bandeirante) 출신의 안드레 푸르타두 드 멘돈사(André Furtado de Mendonça)가 매복 작전을 조직해 줌비를 찾아냈습니다. 그가 살해된 뒤 머리는 잘려 헤시피(Recife)로 보내져 공개적으로 전시되었는데, 이는 줌비가 불멸의 존재가 아니며 킬롬부 저항이 끝났음을 선포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11월 20일은 브라질에서 흑인 인식의 날(Dia da Consciência Negra)로 기념되며, 줌비의 삶과 저항 정신을 기리는 날이 되었습니다.

이미지 출처: hades00 및 Shutterstock

주석 |1| DAMASCENO, Felipe Aguiar. 『페르남부쿠 팔마레스 지역의 점령(17~18세기)』. 리우데자네이루 연방대학교 철학·사회과학연구소 사회사학 박사학위논문, 2015, p. 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