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5년 예방 쿠데타(Preventive Coup of 1955)는 '11월 11일 운동'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에누리크 테이셰이라 로트(Henrique Teixeira Lott) 장군이 주도한 반격 쿠데타로, 주스셀리누 쿠비체크(JK)의 대통령 취임을 확보한 역사적 사건이다.

1955년 예방 쿠데타는 1955년 11월 11일 로트가 조직한 반격 쿠데타로 이어진 일련의 사건들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로트는 이 반격이 우데니스타(UDN 세력)들의 위협에 놓인 주스셀리누 쿠비체크의 취임을 보장하기 위해 단행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배경
1955년 예방 쿠데타는 제툴리우 바르가스(Getúlio Vargas) 두 번째 정부 시기 브라질을 덮친 심각한 정치 위기, 특히 1954년 8월 바르가스의 자살에서 비롯된 결과물이었다. 이 정치적 위기는 대통령직 계승 문제로까지 확대되며 브라질 민주주의의 구조적 문제점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바르가스 정부의 위기는 1945년에 창당된 자유주의·보수 성향의 정당인 국민민주연합(UDN)의 반대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었다. 바르가스 정부는 국영 석유기업 페트로브라스(Petrobras) 설립으로 이어진 국가주의 노선과 국가의 경제 개입 정책 때문에 여러 방면에서 공격을 받았다.
우데니스타들은 상당수가 국제적 이해관계와 연결되어 있었고, 이러한 노선에 반대하며 제툴리우를 상대로 대대적인 소요와 공격, 상당수는 근거 없는 것들이었다, 감행했다. 최저임금 100% 인상 조치와 토넬레루 거리 총격 사건으로 정국은 더욱 악화되었고, 결국 대통령은 자살이라는 비극적 선택을 하게 되었다.
1955년 대선
제툴리우 바르가스의 자살 이후 브라질 대통령직은 부통령이던 카페 필류(Café Filho)가 승계했다. 원칙적으로 카페 필류의 임기는 1956년 1월 31일까지 지속될 예정이었으며, 이후 1955년 10월 대선에서 선출된 새 대통령이 취임할 예정이었다.
1955년 초, 카를루스 라세르다(Carlos Lacerda)를 필두로 한 UDN의 많은 당원들은 1955년 대선 결과의 무효화를 주장하기 시작했고, 스스로 '비상정부'라 명명한 임시 정부 수립을 요구했다. 이 발언은 1946년 헌법과 제4공화국의 브라질 민주주의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었다.
우데니스타들의 이러한 주장은 주스셀리누 쿠비체크의 출마로 당내에 만연한 비관론을 반영한 것이었다. 1945년과 1950년 대선에서 연달아 패배했던 우데니스타들은 JK의 높은 인기를 고려할 때 1955년에도 패배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판단했다. 결국 그들의 요구는 '게툴리스타' 세력의 재집권을 차단하려는 의도였던 것이다.
이러한 비관론과 쿠데타 옹호 분위기 속에서 UDN은 유아레스 타보라(Juarez Távora)를 대통령 후보로, 밀톤 캠포스(Milton Campos)를 부통령 후보로 내세웠다. 한편 PSD와 PTB는 다시 연합하여 1955년 2월 주스셀리누 쿠비체크와 주앙 고울라르트(João Goulart)를 후보로 발표했다. 이 외에도 아데마르 드 바호스(Ademar de Barros, PSP)와 플리니우 살가두(Plínio Salgado, PRP)가 대선에 출마했다.
보수 진영은 JK의 출마에 극도로 절박해져 있었고, 1955년 9월 카를루스 라세르다는 '브란디 서한(Brandi Letter)'이라 불리는 문서를 공개 낭독했다. 주앙 고울라르트에게 보낸 것으로 알려진 이 편지는 그와 아르헨티나 페론 정부 간의 연결고리를 시사했으며, 무장 혁명을 일으켜 브라질에 조합주의 공화국을 수립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고 주장되었다. 그러나 후속 조사 끝에 이 문서는 위조된 것으로 밝혀졌다.
JK의 우세가 예상됐고 유아레스 타보라의 선거 운동이 부진하다고 평가받았음에도, 실제 결과는 상당히 근소한 차이를 보였다. 주스셀리누 쿠비체크는 36%의 득표율로 당선했고, 유아레스 타보라가 30%, 아데마르 드 바호스가 26%, 플리니우 살가두가 8%를 득표했다. 부통령으로는 주앙 고울라르트가 44%의 득표로 선출되었다.
선거에서 또다시 패배할 운명임을 깨달은 우데니스타들은 주스셀리누 쿠비체크의 취임을 저지하기 위해 결집하여 합법성의 원칙을 공격하고, JK가 공산주의 음모에 의해 당선되었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당시 한 반공 단체는 JK의 승리가 "가장 저열한 선동가들에게 조종당하고 공산당의 교활한 선전에 독살된, 무지하고 고통받으며 환멸에 빠진 대중으로 구성된 유권자"의 산물이라고 주장했다.
UDN이 내놓은 또 다른 필사적인 논거는 JK의 승리에 대한 이의 제기였다. 그가 절대 과반 득표를 달성하지 못했다며 그의 취임이 '불법적'이라는 주장이었다. 이러한 논거의 진짜 목적은 PSD와 PTB를 권력에서 몰아내고 UDN이 국가적 정치 세력으로 부상하는 데 있었다.
이 갈등 상황은 1년 내내 지속되었고, JK의 승리를 확정짓는 대선이 치러진 10월에는 더욱 격화되었다. 11월 1일, 주란디르 마메데(Jurandir Mamede) 대령은 주스셀리누 쿠비체크의 취임을 막기 위한 군사 쿠데타를 공개적으로 옹호하는 연설을 했다. 마메데의 연설은 쿠데타 세력과 입헌파 사이의 대립에 불을 지필았고, 에누리크 테이셰이라 로트 장군을 크게 분노하게 만들었다.
로트 장군과 반격 쿠데타
육군부 장관을 맡고 있던 로트 장군은 철저한 법치주의자로 알려져 있었다. 그의 입장에서는 10월 선거에서 누가 승리했든 헌법적 합법성이 준수되어야 했으며, 따라서 JK가 반드시 취임해야 했다. 로트는 자신의 영향력을 동원해 공산주의자들과 카를루스 라세르다 같은 급진 보수파에 맞서 싸워왔다.
문제는 마메데 대령이 육군참모대학(Escola Superior de Guerra) 소속이라 대통령만이 그를 징계할 권한을 가졌다는 점이었다. 로트는 카페 필류 대통령에게 반역적 대령에 대한 징계를 요청했지만, 카페 필류가 건강상의 이유로 1955년 11월 3일 대통령직을 사실상 사임하면서 이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하원 의장 카를루스 루스(Carlos Luz)가 11월 8일 브라질 대통령직을 대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카를루스 루스는 주스셀리누 쿠비체크에 맞서는 정치인으로 악명이 높았고, UDN이 부추기던 쿠데타 구상의 옹호자였다. 결국 카를루스 루스는 마메데 징계에 대한 로트의 요청을 거부했다.
대통령의 거부에 로트는 11월 10일 육군부 장관직을 사임했고, 다음 날 수많은 육군 장성들의 지원을 받아 1955년 예방 쿠데타로 알려진 반격 쿠데타를 조직했다. 로트는 이 반격이 JK 취임 저지 음모를 무력화하기 위해 단행되었다고 주장했다.
로트의 행동은 신속하고 강력했다. 전차가 거리 곳곳과 전략 요충지에 배치되었고, 로트를 지지하는 군부 세력이 이를 장악했다. 대행 대통령 카를루스 루스는 순양함 탐다레(Tamandaré) 호를 타고 급히 도피했다. 한편 로트는 빠르게 정세를 장악하여 정치 지도부들로부터 카를루스 루스 축출의 승인을 얻어냈다.
브라질 정치 지도층은 상원 의장 네레우 하무스(Nereu Ramos)의 대통령 취임을 발표했다. 네레우 하무스의 취임 이후 브라질은 주스셀리누 쿠비체크의 취임이 확정될 때까지 계엄 상태로 통치되었다. 이처럼 로트가 단행한 군사 개입은 브라질 헌정 질서의 연속성을 지켜냈지만, 동시에 브라질 민주주의가 얼마나 취약한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 참고 문헌: SKIDMORE, Thomas E. 『Brazil: From Getúlio to Castello (1930-1964)』. São Paulo: Companhia das Letras, 2010, p. 186.
* 이미지 출처: FGV/CPDO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