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브라질 초대 대통령, 데오도로 다 폰세카 정부의 모든 것

마르셸(원수) 데오도로 다 폰세카는 브라질 역사상 최초의 대통령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1889년부터 1891년까지 대통령직을 수행했으며, 역사학자들은 그의 정부를 임시정부 시기와 헌정정부 시기, 두 단계로 구분합니다. 데오도로 다 폰세카 정부는 원수의 권위주의적 행보로 인해 대통령으로서의 입지가 점차 잠식되었고, 결국 사임이라는 결말을 맞이하게 됩니다.

데오도로는 어떻게 브라질 대통령이 되었나?

1889년의 공화국 선포가 결과적으로 원수를 브라질 대통령으로 만든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군부와 상파울루 커피 재배 농장주들 사이에서 왕정의 영향력이 점진적으로 약화되면서 촉발되었습니다. 이들 집단은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공화제를 지지하기 시작했습니다.

데오도로 다 폰세카는 본래 군주주의 성향의 군인이자 페드루 2세 황제의 친구였습니다. 그러나 왕정을 전복한 쿠데타가 일어난 그 주간에 베냐민 콘스탄트(Benjamin Constant)와 같은 공화주의자들의 설득을 받아 진행 중이던 음모에 가담하게 됩니다. 15일, 원수는 군대를 동원해 우루프레투 자작(Visconde de Ouro Preto)이 이끄는 내각을 전복시켰습니다.

다만 내각의 전복이 곧바로 브라질 왕정의 종말을 의미하지는 않았습니다. 공화국 선포는 마지막 순간에야 이루어졌으며, 이를 선포한 사람은 리우데자네이루 시의회 의원 조제 두 파트로시니우(José do Patrocínio)였습니다. 이로써 임시정부가 구성되었고, 임시정부는 데오도로 다 폰세카를 브라질 대통령으로 지명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데오도로 다 폰세카 정부 (1889~1891)

원수는 브라질 역사상 첫 번째 대통령이었으며, 그의 정부와 함께 약 10년간 지속되는 과도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이 과도기는 정치적·경제적 위기로 점철되었습니다. 실제로 데오도로 정부 초기에는 매우 격렬한 정치 분쟁이 벌어졌습니다.

브라질 초대 대통령, 데오도로 다 폰세카 정부의 모든 것

정치 세력 중 하나는 실증주의자(포지티비스트)였습니다. 이들은 군인과 법조인 사이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지닌 이념 집단으로, 국가에 군사독재를 설치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그 핵심은 권위주의를 통한 국가 근대화였습니다. 반면 다른 세력인 자유주의자들은 헌법 제정을 위한 제헌의회 소집과 개인의 자유에 초점을 둔 자유공화국 수립을 내세웠습니다.

데오도로 다 폰세카 정부는 앞서 언급한 대로 임시정부와 헌정정부, 두 시기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습니다.

임시정부

임시정부는 15개월간 지속되었으며, 국가의 미래 방향을 정하기 위한 자유주의자와 실증주의자 간의 갈등은 극에 달했습니다. 이 시기의 또 다른 중요한 과제는 구왕정의 상징들을 새로운 공화국 상징으로 교체(혹은 지워내는)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공화국 선포와 함께 여러 지명들이 새 정부에 의해 변경되었습니다.

왕정의 상징을 해체하는 것 외에도 새 정부는 스스로에 대한 정치적 지지 기반을 확보해야 했습니다. 이에 따라 내각제와 같은 왕정의 제도들이 폐지되었고, 공화정부의 요직은 퀸티누 보카이우바(Quintino Bocaiuva), 드미트리우 리베이루(Demétrio Ribeiro), 캠푸스 살레스(Campos Sales) 등 공화주의자들이 차지했습니다.

국토가 분열되는 것을 막기 위해 대규모 귀화법(Lei Grande Naturalização)이 승인되었습니다. 이는 당시 브라질에 거주하던 모든 외국인의 귀화를 일괄 인정한 조치입니다. 또한 이 정부 시기에 국가와 교회의 분리도 결정되었습니다.

실증주의자와 자유주의자 간의 다툼은 자유주의자들의 승리로 끝났고, 그들은 브라질의 새 헌법을 제정하기 위한 제헌의회 소집에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헌법 제정 과정에서 국가는 심각한 경제 위기에 직면했으며, 이 위기는 1890년대 말까지 브라질을 계속 괴롭히게 됩니다.

엔실랴멘투(Encilhamento)

체제 전환기의 정치적 혼란에 더해, 데오도로 다 폰세카 정부는 브라질 역사상 가장 심각한 경제 위기 중 하나인 엔실랴멘투(Encilhamento)에 직면했습니다. 이 위기는 루이 바르보자(Rui Barbosa)가 재무장관으로 재직하던 시절 취한 정책의 결과물이었습니다.

당시 브라질은 큰 변혁의 시기를 겪고 있었는데, 그중 가장 민감한 변화가 1888년에 이루어진 흑인 노예 노동의 폐지였습니다. 노예제 폐지로 약 70만 명이 자유를 얻으면서 지폐에 대한 수요가 급격히 높아졌습니다. 그러나 유통되던 지폐의 양은 턱없이 부족했고, 이에 장관은 제도 개편에 나서기로 결정합니다.

그리하여 1890년 1월 17일 은행법이 통과되었습니다. 참고로 이 법안은 대통령에게 알리지 않은 채 처리되었습니다. 이 법을 통해 루이 바르보자는 민간 은행의 지폐 발행을 허용했으며, 국가 경제 개발을 촉진하고 자본 시장을 활성화하기 위한 여러 장치도 마련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처참했습니다. 수많은 회사들이 우후죽순 생겨났고, 증권 거래소의 투기 열풍이 거세지면서 거짓 번영이라는 착각이 만들어졌습니다. 결국 거품이 꺼지자 신생 기업들이 줄줄이 도산했고, 브라질 화폐는 매우 높은 인플레이션 속에서 가치를 급속히 잃어갔습니다.

헌정정부

데오도로 다 폰세카 정부의 헌정 시기는 브라질 새 헌법의 공포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 헌법은 1890년 12월에 취임한 제헌의회의 산물이었으며, 제헌의회는 국가의 경제 엘리트와 일부 중산층 인사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제헌의회는 브라질의 새 헌법을 작성했고, 그 공포는 1891년 2월에 이루어졌습니다. 새 헌법은 군정 시기에 비해 국가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지만, 동시에 국가를 통치하던 엘리트들의 배타적 이해관계를 고스란히 반영하기도 했습니다.

헌법에 따라 브라질은 재선이 금지된 4년 임기의 대통령제 공화국이 되었습니다. 남성 보통선거권이 규정되었으나 문맹자는 배제되었고, 교회와 국가의 공식적 분리가 이루어졌으며, 연방제가 도입되어 브라질 각 주에 일정한 자율성이 부여되었습니다.

새 헌법이 공포된 후 간접선거를 통한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습니다. 의원들은 대통령과 부통령을 따로 선출했습니다. 대통령 후보는 데오도로 다 폰세카와 프루덴치 드 모라이스(Prudente de Morais)였고, 부통령 후보는 에두아르두 반덴콜크(Eduardo Wandenkolk, 데오도로 지지)와 플로리아누 페이소투(Floriano Peixoto, 프루덴치 지지)였습니다.

선거 결과 129표를 얻은 데오도로 다 폰세카가 대통령에, 153표를 얻은 플로리아누 페이소투가 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이로써 데오도로의 헌정정부가 출범했지만, 이 시기는 그해 11월까지만 지속되었습니다. 대통령과 입법부 사이의 커지는 갈등이 그의 입지를 잠식했고, 결국 지지 기반을 상실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제헌의회 의원들은 1891년 헌법 공포와 함께 국회의원이 되었습니다. 대통령과 의회의 갈등은 데오도로가 의원들의 견제 없이 중앙집권적이고 권위주의적인 방식으로 통치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데오도로 다 폰세카 정부는 어떻게 끝났나?

1891년 내내 대통령은 브라질 의회 의원들과 점점 더 불편한 관계에 놓였습니다. 데오도로의 권위주의가 가장 큰 문제였고, 이는 국내 정치 분쟁을 한층 심화시켰습니다. 데오도로 다 폰세카는 권위주의적일 뿐만 아니라 정치적 감각도 부족했습니다.

그는 '면책파(indemnistas)'라 불리는 인물들, 즉 노예제 폐지 이후 공화주의로 돌아선 옛 왕정 지지 보수파들을 주지사 등 여러 요직에 임명하려 했습니다. 이러한 행보는 오랫동안 공화주의를 지지해 온 '역사적 공화주의자'들의 반발을 샀습니다.

특히 가장 큰 파장을 일으킨 인사는 당대 유명한 군주주의자였던 바랑 드 루세나(Barão de Lucena)의 노동부 장관 임명이었습니다. 이 임명은 브라질 공화주의자들을 격분시켰습니다. 대통령과의 충돌 속에서 의원들은 1891년 하반기, 대통령 권한을 축소하는 책임법(Lei de Responsabilidade) 통과를 추진했습니다.

대통령의 대응은 극단적이었습니다. 11월, 그는 의회의 폐쇄와 해산을 선언했고, 민간과 군부의 반발은 즉각적이었습니다. 대통령의 조치에 맞서는 정치적 저항 운동이 조직되었고, 리우데자네이루에서는 철도 파업이 일어났으며, 해군 함대(Armada)는 반란을 일으켜 의회 재개를 요구하며 응하지 않으면 리우데자네이루를 폭격하겠다고 위협했습니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국가가 내전으로 치달을 것을 우려한 대통령은 결국 1891년 11월 23일 사임했습니다. 그의 뒤를 이어 부통령 플로리아누 페이소투가 대통령직을 승계했는데, 이는 플로리아누와 의회 간의 일종의 합의를 통해 브라질의 정치적 안정을 보장하기 위한 조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