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제2차 세계대전의 시작을 알린 폴란드 침공: 배경과 경위

1939년 9월, 약 150만 명의 독일 병사가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습니다. 독일의 폴란드 정복은 한 달도 채 걸리지 않았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시작을 알린 폴란드 침공: 배경과 경위

제2차 세계대전은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분쟁으로, 6년간의 전쟁 동안 약 6천만 명(일부 추정치에서는 8천만 명에 이른다고도 합니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 전쟁은 '총력전'의 성격을 띠었는데, 참전국들은 전쟁을 지속하기 위해 국가가 보유한 모든 자원을 동원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은 1939년 9월 1일 독일의 폴란드 침공이었습니다.


배경

제2차 세계대전의 주된 원인은 아돌프 히틀러가 추진한 독일의 팽창주의였습니다. 히틀러는 소위 '생존 공간(Lebensraum)' 건설이라는 명분을 내세웠습니다. 이 개념은 슬라브족과 같은 타민족을 지배하고 말살하는 대가로 독일 민족의 발전을 위한 영토를 확보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생존 공간 확보를 위해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의 규정을 어기면서까지 군대를 전면적으로 재건했고, 오스트리아와 체코슬로바키아 같은 인접 국가들을 하나씩 합병해 나갔습니다. 영국과 프랑스가 이러한 독일의 팽창주의를 방관하자, 히틀러는 다음 목표로 폴란드에 눈을 돌렸습니다.

히틀러가 폴란드에서 노린 것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잃었던 영토를 되찾는 것이었으며, 특히 '폴란드 회랑' 회복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폴란드 회랑은 동프로이센과 독일 본토를 갈라놓는 폴란드 영토의 좁은 지대로, 단치히(Danzig) 시가 위치해 있던 곳입니다.

히틀러의 격앙된 대(對)폴란드 연설에 위협을 느낀 폴란드 정부는 자국만으로는 독일의 군사력에 맞설 수 없다는 판단 아래 방어 대책을 모색했습니다. 그리하여 폴란드는 영국과 프랑스와의 동맹을 추진해, 독일의 공격을 받을 경우 동맹국의 보호를 받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영불 양국에게 폴란드와의 동맹은 사실상 허풍에 가까운 것이었습니다. 이 동맹은 폴란드에 군사적 지원을 제공하기보다 히틀러의 확장을 저지하는 데 더 큰 의미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분쟁 발발 직전의 마지막 단계는 독일과 소련 간의 조약, 이른바 독소 조약 체결이었습니다. 이 협정은 양국 간 10년간의 평화를 규정하고 독일에 유리한 일련의 무역 협정을 보장했습니다. 더 나아가 이 조약은 비밀리에 독일과 소련이 폴란드를 침공해 영토를 분할하기로 합의하는 내용까지 담고 있었습니다.

양국 간의 이 비밀 합의는 어느 쪽도 폴란드라는 국가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역사가 맥스 헤이스팅스(Max Hastings)의 말처럼 "베를린과 모스크바의 눈에 폴란드 국가는 1919년 연합국의 강압으로만 존재하게 된 것일 뿐, 그 어떤 정당성도 없었다"|1|는 것입니다. 8월 마지막 몇 주 동안 독일의 적대 행위가 날로 고조되면서 독일의 대폴란드 전쟁 의도가 뚜렷하게 드러났습니다.


폴란드 침공

폴란드 침공은 1939년 9월 1일 새벽 공식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독일군은 150만 명의 병력을 동원했으며, 여기에 장갑 차량 3,600대와 군용기 1,929대가 지원했습니다|2|. 독일군은 폴란드 영토로 진입하는 한편, 전함 슐레스비히홀슈타인(Schleswig-Holstein)으로 항구 도시 단치히를 공격했습니다.

히틀러는 독일의 공격을 국경 도시에 있는 독일 라디오 방송국에 대한 폴란드의 공격에 대한 응징이라고 정당화했습니다. 그러나 이른바 폴란드의 공격은 실제로는 위장 작전(false flag operation), 즉 폴란드 침공의 구실을 만들기 위해 독일이 꾸민 자작극이었습니다. 글라이비츠(Gleiwitz)의 독일 라디오 방송국을 습격한 것으로 알려진 '폴란드 병사'들은 사실 독일 수용소에서 약물을 주입당한 포로들이었습니다.

독일의 공격에 따라 영국과 프랑스는 9월 3일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영불 양국은 히틀러에게 최후통첩을 보내는 일에 극도로 소극적이었지만, 내부 논쟁 끝에 결국 전쟁을 선포하게 되었습니다. 이 선전포고는 히틀러를 놀라게 했습니다. 외무장관 리벤트로프가 영국은 물러서서 선전포고를 하지 않으리라고 확신시켰기 때문입니다.

독일의 침공은 부분적으로 동원 해제 상태에 있던 폴란드군을 기습하는 형국이었습니다. 폴란드는 프랑스와 영국의 지침에 따라 히틀러에게 공격의 빌미를 주지 않도록 군대 동원을 삼가라는 지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 선택은 폴란드에 불리하게 작용했습니다. 침공 당시 군대의 3분의 1만 동원되어 방어선에 배치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3|.

연합국(당시 영국과 프랑스)은 폴란드의 저항이 독일의 공세를 몇 달간 버틸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그러나 불과 몇 주 만에 폴란드는 붕괴하고 말았습니다. 독일이 폴란드를 상대로 거둔 승리는 부분적으로 당시 혁신적인 전술이었던 전격전(Blitzkrieg) 덕분이었습니다. 여기에 폴란드군이 잘못된 방어 전략을 채택한 점도 독일의 승리를 한층 수월하게 만들었습니다.

독일과 싸우던 중이던 9월 17일, 소련마저 폴란드를 침공했습니다. 폴란드는 소련의 공격을 전혀 예상하지 못해 동부 국경이 완전히 무방비 상태였습니다. 역사가 안토니 비버(Antony Beevor)의 말대로 "나치 정부와 소련 정부가 협조하여 이중 침공을 감행한다는 생각은 너무나 터무니없는 역설로 여겨졌기"|4| 때문입니다.

폴란드의 패배는 9월 28일 수도 바르샤바가 나치 독일에 항복하면서 공식화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영국과 프랑스는 폴란드에 대한 약속을 지키지 못했고, 약속했던 지원은 끝내 전달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폴란드는 독일과 소련(9월 17일부터)을 상대로 홀로 싸워야 했습니다. 독일의 이 승리 이후 '가짜 전쟁(Phoney War)'이라 불리는 시기가 시작되었는데, 이 시기에는 전투가 거의 없었으며 1940년 4월 노르웨이 침공이 시작되면서 비로소 막을 내렸습니다.

참고 자료

|1| HASTINGS, Max. 『지옥: 전쟁 속의 세계 1939–1945』(Hell: The World at War 1939-1945). 2012, p. 16.
|2| 상동, p. 18.
|3| BEEVOR, Antony. 『제2차 세계대전』(The Second World War). 2015, p. 36.
|4| 상동, p. 36.

* 이미지 출처: Everett Historical, Shutterstoc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