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 레오폴디나(Maria Leopoldina)는 오스트리아의 대공녀로, 브라질 최초의 황후로 잘 알려진 인물입니다. 유럽에서 가장 전통 깊은 왕가 중 하나에서 성장한 레오폴디나는 페드루(Dom Pedro)와 결혼하였으며, 그가 브라질의 독립을 선언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인물 중 한 명이었습니다.
그러나 레오폴디나의 결혼 생활은 결코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남편은 극심하게 불신했고 여러 차례 외도를 저질렀으며, 심지어 정부들을 아내와 같은 집에서 살게 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녀는 일곱 명의 자녀를 낳았으나, 유산으로 인해 발생한 패혈증으로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출생과 유년 시절

레오폴디나는 빈에서 태어났으며, 유럽에서 가장 전통 있는 왕실 가문 중 하나인 합스부르크-로렌(Habsburg-Lorraine) 가문의 일원이었습니다. 1797년 1월 22일, 어머니는 황후 마리아 테레사, 아버지는 황제 프란츠 2세(오스트리아의 프란츠 1세로도 알려짐)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오스트리아 왕족의 일원으로서 그녀의 작위는 '대공녀(Erzherzogin)'였습니다.
레오폴디나는 신성 로마 제국(1806년 오스트리아 제국으로 개편됨)에게 매우 긴장된 시기에 태어났습니다. 당시 오스트리아는 프랑스와 전쟁 중이었고, 프랑스 혁명의 이념으로 인해 유럽의 절대왕정들은 위기를 맞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어린 시절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은, 그녀가 태어나기 수년 전에 고모할머니인 마리 앙투아네트가 프랑스 왕정의 몰락과 함께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는 것입니다.
오스트리아 대공녀의 본명은 카롤리나 요제파 레오폴디나 페르난다 프란치스카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Carolina Josefa Leopoldina Fernanda Francisca of Habsburg-Lorraine)이며, 흰 피부와 파란 눈, 금발을 지닌 인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레오폴디나의 교육은 귀족의 신분에 걸맞게 매우 충실하고 질 높은 수준이었습니다. 그녀는 읽기와 쓰기를 배웠고, 문학·역사·음악·무용을 공부했으며, 네 개 국어(프랑스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영어)를 구사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그녀는 왕실 생활에 필수적인 예법과 사교 규칙도 익혔습니다. 시녀가 그녀에게 몸가짐과 궁중 에티켓을 가르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레오폴디나의 주요 관심 분야는 식물학과 광물학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교육에서 중요한 부분은 가문의 결정에 무조건 복종하고, 국가와 왕조의 이익을 언제나 최우선으로 여기는 자세를 배우는 것이었습니다.
레오폴디나의 결혼
레오폴디나와 페드루(Dom Pedro)의 결혼은 빈 회의 기간 동안 시작된 오스트리아와 포르투갈 외교단 간의 협상 결과물이었습니다. 당시 포르투갈은 자국의 위상을 높이고 열강들의 무대에 입성하기 위해,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군주국 중 하나와의 통혼을 필요로 하고 있었습니다.
포르투갈 왕위 계승자와 오스트리아 대공녀의 결혼은 포르투갈이 유럽의 주요 군주국 반열에 올랐다는 상징성을 지녔으며, 나아가 포르투갈 내 영국의 영향력을 줄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반면 오스트리아에게는 새로이 왕국으로 승격된 브라질에서의 새로운 가능성을 여는 발판이 되었습니다.
레오폴디나와 페드루의 결혼식은 1817년 5월 13일, 빈에 위치한 교회에서 거행되었습니다. 브라질과 오스트리아 간의 거리가 멀어 페드루는 직접 참석하지 못했기 때문에 결혼식은 대리 결혼 방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페드루를 대신하여 참석한 이는 레오폴디나의 숙부인 테셴 공작 카를이었습니다.
결혼식 이후에야 레오폴디나는 브라질행길에 올랐습니다. 항해는 85일간 이어졌으며, 그녀는 1817년 11월 5일 브라질에 도착했습니다. 출항 전 레오폴디나는 포르투갈어를 배웠고, 낯선 환경에 대한 준비를 갖추었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아메리카 곳곳에서 확산되던 공화주의 이념에 물들지 말라고 당부했다고 전해집니다(역사가 클로비스 불카웅 |1|).
레오폴디나와 함께 오스트리아 외교관과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식물학 연구를 진행할 과학자들이 동행했습니다. 그녀의 브라질과 남편에 대한 첫인상은 아버지와 여동생에게 보낸 서신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서신 속에서 그녀는 리우데자네이루의 아름다움에 매료된 감회를 표현하면서도, 페드루의 성격에 대한 몇 가지 특징을 언급했습니다.
브라질 독립에서 레오폴디나의 역할
레오폴디나는 브라질 독립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그녀는 페드루에게 포르투갈과의 단절이라는 길로 나아가도록 설득하는 데 직접 나섰습니다. 역사학자들은 레오폴디나가 당시 정세를 깊이 있게 통찰하고 있었다고 평가합니다. 그녀는 정치적 상황이 나라를 공화국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점을 인식했습니다.
그녀는 브라질을 군주국으로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페드루가 브라질에 남아 브라간사(Bragança) 왕조의 군주국 건설을 주도하도록 하는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역사가 요한나 프란트너(Johanna Prantner)의 정의에 따르면, 레오폴디나는 "브라질이 포르투갈의 통치로부터 해방되는 문제를 브라질 애국자들이 지지하는 입헌군주제와의 거래로 협상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습니다|4|.
당시 그녀는 황제에게서 여전히 큰 영향력을 누리고 있었고, 이를 활용해 자신의 결정에 대한 확고함을 확보했습니다. 페드루는 우유부단한 성격으로 행동 하나하나에 큰 망설임을 보였는데, 레오폴디나는 그가 포르투갈에 대항해야 한다고 설득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레오폴디나의 노력은 성공을 거두었고, 페드루는 브라질에 잔류하여 독립을 주도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녀가 바라던 대로 브라질은 군주국이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주목할 만한 점은, 우리의 독립을 결정지은 긴급 회의를 주재한 사람이 바로 그녀였다는 사실입니다. 이 회의 이후 발송된 서신을 통해 페드루는 1822년 9월 7일 브라질의 독립을 선언하게 되었습니다.
페드루와의 관계

레오폴디나와 페드루의 관계는 부드럽게 말해서도 '순탄치 못한' 것이었습니다. 레오폴디나에 따르면 페드루는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으면 격분하는 성격이었고, 9년의 결혼 생활 동안 훗날 브라질 황제가 될 그는 아내를 존중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었습니다. 두 사람의 관계를 가장 크게 물들인 것은 브라질의 미래 황제의 외도였습니다.
페드루의 처음으로 알려진 외도 상대는 프랑스 출신의 배우이자 무희인 노에미 티에리(Noémi Thierry)였습니다. 페드루는 그녀를 임신시켰고, 레오폴디나가 있는 자리에서조차 그녀와 함께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 관계는 포르투갈 국왕의 개입으로 종결되었고, 노에미는 헤시피로 보내졌습니다. 노에미와 페드루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만 한 살이 되기 전에 요절했습니다.
또 다른 유명한 외도 상대이자 레오폴디나에게 큰 굴욕감을 안겨준 인물은 도미틸라 드 카스트루(Domitila de Castro)였습니다. 페드루는 상파울루 여행 중 그녀를 만났고, 두 사람의 관계는 수년간 지속되었습니다. 도미틸라는 페드루로부터 재산과 귀족 작위를 받았고, 자신의 친척들에게도 여러 특혜를 제공받았습니다.
브라질 황제 즉위 후에도 페드루 1세는 7년간 도미틸라와의 관계를 이어갔습니다. 그녀를 임신시키고 리우데자네이루로 불러들여, 황후인 아내와 함께 살게 하기까지 했습니다. 이로 인해 레오폴디나는 페드루의 대우와 도미틸라에 대한 관심 속에서 점차 심각한 굴욕감을 느꼈습니다. 그 정부는 '산투스 후작부인(Marquesa de Santos)'으로 임명되기까지 했습니다.
페드루는 도미틸라를 "내 마음의 황후"라고 불렀고 |2|, 시간이 갈수록 아내에게 더욱 가혹한 대우를 일삼았습니다. 페드루의 학대는 공개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고, 정부가 있는 자리에서조차 아내를 모멸하는 모습이 당대 사람들의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페드루는 레오폴디나의 경비와 가정 운영 자금을 끊기 시작했으며, 여러 차례 그녀를 폭행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습니다. 불행한 결혼 생활이었음에도, 두 사람의 관계는 기대했던 결실 하나는 얻었습니다. 바로 브라질 왕위의 계승자 페드루 2세(Dom Pedro II)의 탄생이었습니다.
레오폴디나의 죽음
레오폴디나의 마지막 시절은 슬픔으로 점철되어 있었고, 그녀를 서서히 집어삼키는 우울증으로 특징지어집니다. 이 우울증은 황제로부터 겪은 굴욕, 특히 도미틸라와의 불륜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황후의 심경을 전하는 여러 기록이 있으며, 그중 역사가 이자벨 루스토자(Isabel Lustosa)가 소개한 내용을 소개합니다:
저는 폐하를 서재에서 홀로 계신 모습으로 발견했습니다. 건강이 좋지 않아 보였고, 평소보다 더 우울해 보였습니다. 저는 억눌린 느낌을 안고 자리를 떠났습니다. 예상했던 대로, 폐하는 지금껏 겪어본 어떤 고통보다 더 큰 괴로움이 가득한 삶으로 남겨졌고, 그 건강 상태로는 추가적인 짐을 견디기 어려워 보였습니다. |3|
1826년 레오폴디나는 황제 사이에서 다시 임신했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겪던 우울증과 남편과의 갈등은 임신에 악영향을 미쳤습니다. 이 시기에 그녀가 폭행까지 당했다는 보고도 있습니다. 레오폴디나는 유산을 겪었고, 쇠약해진 몸으로 1826년 12월 11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참고 자료
|1| BULCÃO, Clovis. "Leopoldina, the Austrian who loved Brazil." In.: FIGUEIREDO, Luciano. História do Brasil para ocupados. Rio de Janeiro: Casa da Palavra, 2013. p. 237.
|2| LUSTOSA, Isabel. D. Pedro I: um herói sem nenhum caráter. São Paulo: Companhia das Letras, 2006.
|3| 상동, 주석 2.
|4| PRANTNER, Johanna. Imperatriz Leopoldina do Brasil. Petrópolis: Vozes,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