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퓰리즘은 브라질을 비롯한 라틴아메리카 여러 나라의 정치사를 설명할 때 자주 활용되는 핵심 개념입니다.
포퓰리즘의 정의는 다소 복잡하지만, 일반적으로 이 용어는 20세기 내내 라틴아메리카 각국 정부가 행해온 정치적 관행과 정책을 가리키는 데 사용됩니다. 특히 브라질의 경우, 고전적 의미의 포퓰리즘은 1930년부터 1964년까지의 시기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이 시기를 브라질 포퓰리즘의 전성기로 봅니다.
이러한 정의는 21세기까지 이어졌으며, 오늘날에는 자신이 통치하는 지역의 최빈층에게 강력한 호소력을 지닌 정부와 밀접하게 연결된 개념으로 확장되었습니다. 브라질에서 포퓰리즘의 상징으로 꼽히는 대통령으로는 게툴리우 바르가스, 주셀리누 쿠비체크, 주앙 골라르트 등이 있습니다.
포퓰리즘의 5가지 핵심 특징
포퓰리즘의 기본 개념은 마르코스 나폴리타노(Marcos Napolitano) 교수가 제시한 특징들을 통해 구조화할 수 있습니다.
- 지도자와 대중 간의 직접적·비제도적 관계: 포퓰리스트 지도자는 자신의 카리스마에 기반하여 대중과 직접적인 관계를 형성합니다. 또한 이러한 관계는 그것을 정당화해 주는 별도의 정치적 제도 없이 구축됩니다.
- 경제적 민족주의: 포퓰리즘 정권은 경제 문제에서 대체로 민족주의적 성향의 입장을 취합니다.
- 대중 연합을 호소하는 담론: 포퓰리스트 지도자의 언설은 언제나 계급 간 화합, 즉 '국민'을 향한 메시지로 귀결됩니다. 동시에 '국민'을 특권 엘리트나 폭악적인 과두지배층에 맞서는 주체로 설정하는 담론을 강조하기도 합니다.
- 후원에 기반한 정치적 리더십: 카리스마와 국민·국가를 내건 연설 외에도, 포퓰리스트 지도자는 특혜 교환망, 이른바 클라이언텔리즘(clientelism)을 통해 권력 기반을 다집니다.
- 취약한 정당 체제: 고전적 포퓰리즘 개념은 정당 체제가 발달 초기 단계에 있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지도자에 의해 와해되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이는 포퓰리스트 지도자의 권력이 정치 시스템이 아니라 개인의 카리스마에 뿌리내린다는 생각을 뒷받침합니다.
이렇게 규정된 포퓰리즘의 특징은 앞서 말했듯 1930~1964년 브라질 역사와 연결되며, 특히 에스타도 노부(Estado Novo) 시기의 게툴리우 바르가스가 그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라틴아메리카 차원에서는 페론주의(아르헨티나), 아프레이스모(페루), 카르데니스모(멕시코) 등의 역사적 경험을 설명하는 데 포퓰리즘 개념이 활용됩니다.
한편 다른 학자들은 포퓰리즘을 자본주의적 근대화 과정에 놓인 '후진' 사회가 겪는 중간 단계로 보는 대안적 가설을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근대화가 진행되는 동안 해당 사회는 매우 강렬한 긴장을 경험하게 되는데, 포퓰리즘은 이러한 사회가 높은 수준의 발전에 도달할 때까지 이해관계의 충돌을 중재하기 위해 등장한 정치적 메커니즘이라는 것입니다.
역사학자들은 이 용어를 어떻게 분석하고 있을까?
브라질 정치 현상을 개념적으로 설명하는 열쇠로서 포퓰리즘이라는 용어는 1960~70년대에 절정기를 맞았습니다. 그러나 1990년대부터 역사학자들이 이 용어를 재평가하면서 기존의 통념들이 수정되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날의 결론은 포퓰리즘이 브라질의 정치 경험 중 일부는 설명하지만, 그 전부를 설명하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1930~1964년 시기에 대한 포퓰리즘 적용은 새로운 연구들을 통해 의문이 제기되어 왔습니다. 먼저, 지도자의 권력이 대중을 자신의 편으로 조종하는 데 쓰인 카리스마에 전적으로 기반했다는 주장에는 이견이 있습니다. 현재 역사학자들은 대중이 반드시 조종당한 것은 아니며, 지도자의 언설 속에서 자신들의 요구가 충족될 수 있었다고 봅니다.
또 하나의 중요한 쟁점은 정당 체제의 작동 방식입니다. 포퓰리즘의 고전적 정의는 정당 체제가 취약하다고 규정하지만, 이른바 '포퓰리즘 공화국'으로 불리는 브라질 제4공화국의 경우에는 사실과 다릅니다. 당시 대통령의 선출과 집권 유지는 오직 정당적·정치적 지지를 통해서만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제4공화국은 또한 브라질의 민주화 시기였습니다. 비문자(文盲)를 제외하기는 했지만, 보통선거권에 기반한 선거가 처음으로 실시되었고, 정당 정치 생활에 참여하는 시민이 크게 늘어났습니다. 이처럼 복잡하고 긴장과 마찰이 많았던 브라질의 민주화 과정은 1964년 군사 쿠데타로 인해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이 시기 브라질의 정당 체제는 매우 강력해서, 대다수 정치인이 PSD와 PTB를 포함한 동맹 네트워크를 통해서만 선출될 수 있었습니다. 대통령의 지위 유지 역시 정당의 지원에 달려 있었습니다. 주앙 골라르트가 대표적인 사례인데, 그를 지지하던 PSD 소속 정치인들이 UDN이 주도하는 야권으로 이탈하면서 그의 정부는 무너졌습니다.
이러한 이유들로 역사학자들은 '포퓰리즘 공화국'이라 불려온 이 시기를 '제4공화국'으로 명칭을 바꾸자고 제안해 왔습니다. 포퓰리즘이라는 용어가 이 시기 브라질의 모든 정치 경험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제4공화국의 포퓰리스트 대통령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제4공화국으로 알려진 1946~1964년은 브라질 역사상 가장 대표적인 포퓰리즘 시기로 평가받습니다. 이 시기의 주요 대통령은 다음과 같습니다.
- 에우리쿠 가스파르 두트라 (1946~1951)
- 게툴리우 바르가스 (1951~1954)
- 주셀리누 쿠비체크 (1956~1961)
- 자니우 쿼드로스 (1961)
- 주앙 골라르트 (1961~1964)
이 가운데 마지막 네 사람은 브라질 포퓰리즘 정치인의 대표 사례로 꼽힙니다.
우익 포퓰리즘의 대두
최근 몇 년간 '우익 포퓰리즘'이라는 개념이 주목받고 있습니다. 정치학에서 발전된 이 개념은 포퓰리즘적 행태를 보이면서 이념적으로 보수적, 즉 정치 스펙트럼에서 우파에 위치하는 이념이 우세한 정치인과 정부를 지칭하는 데 쓰입니다.
연구자들은 우익 포퓰리즘이 비교적 최근에 형성된 개념으로, 지난 30년간의 시기와 직결된다고 봅니다. 이는 해당 기간에 발생한 사회적·정치적·경제적 위기와, 세계화가 가져온 변화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우익 포퓰리스트 역시 지도자의 의지를 국민 의지의 인격화로 간주하며 그것을 옹호하고, 특정 엘리트나 집단을 공격하는 담론을 내세웁니다. 나아가 과학주의나 지식주의에 대한 배척 성향을 보이며, 이민에 대한 공격적인 태도로 이어지는 경향도 두드러집니다.
아르헨티나의 포퓰리즘: 페론주의
라틴아메리카에서 포퓰리즘으로 분류되는 또 다른 정부는 1946~1955년과 1973~1974년 아르헨티나 대통령을 지낸 후안 도밍고 페론(Juan Domingo Perón)의 정부입니다. 페론의 정치적 유산인 페론주의(Peronismo)에 대한 비판자들은, 페론주의 이념에 영향을 받았다고 여겨지는 이후 정부들을 향해서도 비판을 제기해 왔습니다.
후안 도밍고 페론은 아르헨티나 육군 대령 출신으로, 통합 장교단(GOU)이 국정을 주도하던 시기에 정치적으로 부상했습니다. GOU는 추축국 지원에 관심을 보였던 파시즘 성향의 군인들로 구성되었으며, 반공주의적이고 급진 가톨릭 성향을 띠었습니다.
페론은 노동부에서 재직하며 노동자 계급을 위한 광범위한 입법을 추진하면서 아르헨티나에서 영향력을 키웠습니다. 이러한 명성 덕분에 그는 1946년 대통령 선거에서 약 52%의 득표율로 승리했으며, 1955년 군사 쿠데타로 축출될 때까지 집권했습니다.
페론 정권의 포퓰리즘적 징후는 그의 통치 분석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역사가 루이스 알베르토 로메로(Luis Alberto Romero)는 페론이 "사회와 정치의 모든 부문과 대화할 용의가 있었고 […] '모든 아르헨티나인'을 향한 호소를 일관되게 유지하면서도 각 부문에 맞는 담론을 능숙하게 조율할 줄 알았다"고 평가했습니다.
이 구절에서 우리는 페론의 협상 능력, 즉 다양한 집단을 자신의 이익에 맞춰 화합시킬 수 있었던 카리스마적 지도자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으며, '국가(Nación)'를 향한 담론 역시 엿볼 수 있습니다.
페론은 집권 기간 동안 국가와 노동자 간의 유대를 강력히 강화했습니다. 이는 노조 통제 시도와 수많은 노동자 권리 확대 정책에서 뚜렷하게 드러났습니다.
또 다른 포퓰리즘적 호소력은 '국민 대 엘리트/과두지배층'이라는 이분법적 담론의 창출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로메로는 "페론은 소수 특권층의 이기심만이 반대하는 정의로운 사회, 정당하고 실행 가능한 개혁이라는 담론을 완전히 수용했다"고 지적하며, 페론이 아르헨티나 사회를 '국민'과 '과두지배층'으로 양분했다고 분석했습니다.
페론의 국가관은 국가가 사회 갈등의 중재자가 되어야 하며, 국민의 경제와 안보를 책임져야 한다고 규정했습니다. 로메로는 이러한 페론의 관점이 멕시코 포퓰리즘의 거장인 카르데나스(Cárdenas)의 그것과 유사하다고 평가하면서, 페론의 국가관이 다음을 함의한다고 결론지었습니다.
그것은 공화제 제도의 재편, 민주적·대표적 공간의 평가절하, 그리고 지도자가 자리 잡은 행정부에 대한 입헌 권력들의 종속을 의미했는데, 이 지도자의 정당성은 그러한 제도들보다 압도적인 대중적 지지에서 더 많이 derive 되었다.
마지막으로, 페론의 정책은 노골적으로 민족주의적이었다는 점을 언급할 가치가 있습니다. 첫 번째 집권기 동안 그는 중앙은행을 비롯해 철도와 은행을 국유화했습니다. 아르헨티나 경제의 국유화는 페론주의의 기둥 중 하나였습니다. 페론은 1955년 군사 쿠데타를 통해 권력에서 물러났습니다.
참고 문헌
|1| NAPOLITANO, Marcos. Democracy, "populism" or mass politics: the "Republic of 46".
|2| ROMERO, Luis Alberto. Contemporary history of Argentina. Rio de Janeiro: Zahar, 2006, p. 94.
|3| 상게서, p. 97.
|4| 상게서, p. 106.
|5| 상게 주석 4.
*이미지 출처: FGV/CPDO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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