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스티유 함락이란?
바스티유 함락(Storming of the Bastille)은 1789년 7월 14일 파리 시민들이 바스티유 요새-감옥을 무력으로 점령한 사건입니다.
당시 이 감옥은 프랑스 사법 제도의 전제주의와 자의성을 상징하는 존재였습니다. 바스티유의 함락은 프랑스 혁명 과정에서 결정적인 이정표가 되었으며, 오늘날 7월 14일은 프랑스의 국경일로 기념되고 있습니다.

바스티유 함락의 원인
바스티유가 함락된 배경에는 깊은 사회·경제적 원인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부르주아지와 일반 대중으로 구성된 제3신분은 정치적으로 심하게 소외되어 있었습니다. 경제적 실력을 쥐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제1신분(성직자)과 제2신분(귀족)에 비해 상응하는 정치적 대표권을 갖지 못했습니다. 이 두 신분은 다수의 면세 특권을 비롯해 갖가지 특혜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더해 프랑스는 미국 독립전쟁 참전으로 인한 경제적 부담에 시달리고 있었고, 빵값 인상과 같은 민심을 거스르는 조치들마저 겹쳤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프랑스 전역에서 연쇄 반응을 일으켰고, 도시 하층 민중을 중심으로 한 조직적이고 무장한 대중 운동이 탄생하게 됩니다.
지방에서도 혁명적으로 급진화된 불만 세력이 크게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결국 이 모든 요소가 맞물려 파리 시민의 봉기와 바스티유 습격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바스티유의 구조와 특징
바스티유는 길이 90미터, 폭 25미터의 직사각형 요새로, 성벽 위에 8개의 탑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성벽은 두께 최대 3미터, 높이 30미터에 달하는 견고한 구조였습니다.
요새 주위에는 깊은 해자가 파여 있어 센 강의 물이 흘러 들어갔으며, 두 개의 가동교(개교)가 파리 시 동쪽 입구를 지키는 탑으로 통하는 출입로 역할을 했습니다.
내부는 지상 3개층과 지하 감옥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윗층에는 수감자들의 감방이, 1층에는 일반 감옥이 마련되어 있었고, 지하실에는 서 있을 공간조차 부족한 좁은 감방들이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바스티유 습격의 역사적 배경
바스티유의 기원
훗날 바스티유라 불리게 된 생앙투안 요새(Bastion de Saint-Antoine)는 백년전쟁이라는 시대적 배경 속에서 1370년 프랑스 국왕 샤를 5세에 의해 건설되었습니다. 이 중세 요새는 파리 생앙투안 지구의 입구를 방어하는 군사적 거점이었습니다.
15세기에 들어서며 바스티유는 감옥으로 용도가 변경되었고, 17세기에는 체제에 반대하거나 왕권의 정적(政敵)이 된 지식인과 귀족들이 수감되는 곳으로 변모했습니다.
바스티유 습격은 어떻게 진행되었나?
18세기 루이 16세(1754~1793) 재위 기간 동안 농업 위기가 프랑스 경제를 황폐화시키며 특히 농민들에게 큰 타격을 안겨주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직면한 국왕은 나라를 경제적 침체에서 구원할 법률을 제정하기 위해 삼부회(Estates General)를 소집했습니다.
이에 부르주아지는 계몽주의 이념에 기반해 국왕에게 압박을 가했고, 그 결과 프랑스 헌법을 제정하기 위한 국민제헌의회 창설이 승인됩니다.
그러나 루이 16세가 이 움직임을 억누르기 위해 군대를 집결시키면서 파리는 혁명 직전의 긴장 상태에 몰렸습니다. 이때 언론인 카미유 데물랭(Camille Desmoulins, 1760~1794)이 임박한 무력 진압 소식을 대중에게 알렸고, 이를 계기로 근위병·제대군인·부르주아지가 중심이 된 '파리 민병대'가 결성되었습니다.
민병대는 먼저 앵발리드(Hôtel des Invalides)를 습격해 다량의 무기를 탈취한 뒤, 1789년 7월 14일 화약과 무기가 보관되어 있던 바스티유 요새로 향했습니다. 당시 요새는 스위스 근위병 32명과 현지 병사들, 그리고 대포 3문으로 방어되고 있었습니다.
감옥 소장 드 로네(Marquis de Launay)는 협상 외에 선택지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요새 내 장교들이 발사한 한 발의 총성이 교전의 신호탄이 되었고, 몇 시간에 걸친 총격전 끝에 드 로네는 항복했습니다.
결국 그는 포획된 뒤 참수되어 그 머리가 효수되는 비운을 맞았습니다. 이 충돌에서 근위병 1명과 백 명 미만의 혁명가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습격 이후 바스티유는 불타 폐허가 되었고, 몇 달 뒤 완전히 철거되었습니다.
바스티유 함락의 결과
바스티유의 함락은 진행 중이던 변화를 한층 가속화시켰습니다. 부르주아지는 민중이 자신들의 편임을 확실히 인식하고 이 지지 기반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성직자 일부 역시 제3신분에 합류했습니다.
이렇게 연합한 세력들은 1789년 6월 20일 헌법 공포를 요구했고, 이는 국왕의 권력을 제한해 프랑스의 전제주의를 종식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바스티유 습격 이후 파리 민병대는 더욱 강력해졌으며, 민중 역시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되었다는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다만 이후 혁명은 점차 급진화되어, '공포정치(Terror)'로 알려진 강력한 탄압의 시기를 거치게 됩니다.

프랑스 국경일의 유래
7월 14일은 바스티유 습격 바로 다음 해인 1790년 처음 기념되었습니다. 이 날 열린 '연맹제(Fête de la Fédération)'는 프랑스 국민의 단결을 상징하는 행사였습니다.
제3공화국 시절인 1880년, 의원 뱅자맹 라스파유(Benjamin Raspail, 1823~1899)의 제안으로 7월 14일이 공식적인 국경일로 지정되었습니다. 당시 공화파와 보수파 어느 쪽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이 날이 바스티유 습격을 기념하는 것인지 연맹제를 기념하는 것인지에 대한 명확한 언급은 의도적으로 피해졌습니다.
오늘날에도 이 날이면 파리에서는 전통적으로 군사 퍼레이드가 열리고, 밤에는 대규모 불꽃놀이가 펼쳐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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