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몬 볼리바르(Simón Bolívar)는 남아메리카 역사에서 가장 잘 알려진 인물 중 한 명입니다. 베네수엘라 귀족 가문 출신의 군인이었던 그는 베네수엘라, 콜롬비아, 에콰도르, 페루, 볼리비아 등 다섯 나라의 독립 운동을 이끌었습니다. 뛰어난 군사 전략가로 평가받은 볼리바르는 '엘 리베르타도르(El Libertador)', 즉 '해방자'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젊은 시절 볼리바르는 스페인계 아메리카 국가들의 독립을 위해 싸우겠다는 맹세를 했습니다. 그는 또한 외세에 맞서 남아메리카 국가들을 하나로 통합하는 영토 통합 구상을 옹호하며 명성을 얻었습니다. 그는 이 프로젝트를 '그란 콜롬비아(Gran Colombia)'를 통해 실현하려 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유년 시절과 교육
시몬 호세 안토니오 데 라 산티시마 트리니다드 볼리바르 팔라시오스 폰테 이 블랑코(Simón José Antonio de la Santísima Trinidad Bolívar Palacios Ponte y Blanco)는 1783년 7월 24일 베네수엘라 카라카스에서 태어났습니다. 18세기 말 베네수엘라는 스페인의 식민지였으며, '베네수엘라 총독령(Captaincy General of Venezuela)'에 속해 있었습니다. 볼리바르가 태어난 가문은 부유한 지역 귀족 집안이었습니다.

볼리바르와 그의 가족은 크리올로(criollo), 즉 아메리카 대륙에서 태어난 스페인인의 직계 후손이었습니다. 볼리바르의 가문은 구리와 은 광산, 설탕과 코코아를 생산하는 농장을 소유했고 수천 명의 노예를 보유할 만큼 부유했습니다. 그러나 볼리바르의 풍요로운 유년기는 부모님의 죽음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그의 아버지 후안 비센테 볼리바르(Juan Vicente Bolívar)는 1786년, 볼리바르가 두 살이던 시절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후 1792년, 아홉 살이 되기 전에는 어머니 마리아 데 라 콘셉시온 팔라시오스 이 블랑코(María de la Concepción Palacios y Blanco)마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렇게 된 볼리바르는 여러 보호자의 손에서 자랐으며, 그중 주된 보호자는 삼촌 카를로스 팔라시오스 이 블랑코였습니다.
볼리바르의 청소년기 교육에서 가장 두드러진 역할을 한 스승은 시몬 로드리게스(Simón Rodríguez)와 안드레스 벨료(Andrés Bello)였습니다. 또한 볼리바르가 유럽에 머무는 동안에는 18세기 말 스페인에서 요직을 지냈던 우스타리스 후작, 헤로니모 데 우스타리스 이 토바르(Jerónimo de Ustáriz y Tovar)의 지도를 받기도 했습니다.
14세 때 볼리바르는 베네수엘라 북부 아라과 계곡 지역의 대대에 입대하며 첫 군사 경험을 쌓았습니다. 1799년에는 학업을 더하기 위해 스페인으로 여행을 떠났고, 이 시기에 우스타리스 후작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이 여행의 또 다른 중요한 순간은 바로 마리아 테레사 로드리게스 델 토로 알라이사(María Teresa Rodríguez del Toro Alayza)를 만난 것이었습니다.
마리아 테레사는 볼리바르처럼 귀족 신분의 크리올로 가문 출신이었습니다. 그는 1800년에 그녀를 만나 같은 해 8월 약혼했고, 1802년 5월 26일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결혼 직후 부부는 베네수엘라로 돌아왔지만, 아내는 황열병에 걸려 1803년 1월 22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내의 죽음 이후 볼리바르는 다시 유럽으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스페인과 프랑스를 거쳐 이탈리아에 도착했는데, 프랑스에서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황제 대관식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이탈리아에서는 옛 스승 시몬 로드리게스를 다시 만났고, 자신의 일생을 정의하게 될 중요한 맹세를 했습니다. 이 여행 마지막에는 미국도 방문했습니다.
혁명가로서의 삶
볼리바르가 혁명가의 길을 걷게 된 중요한 출발점은 1805년 8월 15일, 22세의 나이로 이탈리아에서 행한 몬테 사크로의 맹세(Oath of Monte Sacro)였습니다. 이 자리에서 볼리바르는 스페인계 아메리카 국가들의 해방 사업에 평생을 바치겠다고 서약했습니다.
1807년 카라카스로 돌아온 볼리바르는 사회적으로 격동하는 베네수엘라의 모습을 마주하게 됩니다. 당시 아메리카의 스페인 식민지들을 휩쓴 동요는 스페인이 유럽에서 직면한 문제들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그해 스페인 국왕 페르난도 7세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 의해 폐위되고, 그의 동생 조제프 보나파르트가 왕위에 올랐습니다.
스페인의 약화, 미국 혁명과 같은 최근 사건들이 남긴 영향, 그리고 계몽주의 사상의 확산은 곧 베네수엘라의 동요를 독립 운동으로 발전시켰습니다. 1810년 4월 19일, 카라카스에서 혁명 평의회가 구성되며 독립 투쟁의 서막이 열렸습니다. 볼리바르는 당시 아라과 지역의 자신의 농장에 있었기 때문에 이 행동에는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해방자' 볼리바르
볼리바르는 빠르게 혁명 운동에 합류하여 베네수엘라의 대의에 대한 영국의 지원을 얻기 위한 외교 임무로 런던에 파견되었습니다. 런던에서 그는 중요한 베네수엘라 혁명가인 프란시스코 데 미란다(Francisco de Miranda)와 접촉하여 그가 조국으로 돌아가도록 설득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1811년 볼리바르는 베네수엘라 독립 과정에 깊이 관여했습니다. 그는 독립을 위해 싸우기 위해 결성된 애국협회(Sociedad Patriótica)에 참여했고, 같은 해 첫 전투에도 참전했습니다. 그러나 베네수엘라 제1공화국 선포와 몇 차례의 군사적 승리 이후, 왕당파(스페인 충성파) 세력이 베네수엘라를 탈환하면서 볼리바르는 피신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처음에 퀴라소에 머물렀다가 누에보그라나다의 카르타헤나로 이동했습니다. 카르타헤나에서 그는 제1공화국의 몰락으로 이어진 베네수엘라의 실책들을 분석한 카르타헤나 선언문(Carthagena Manifesto)을 작성했습니다. 또한 누에보그라나다에서 왕당파에 맞서 싸울 소규모 부대를 조직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볼리바르는 최종 목적지를 카라카스로 하는 진격을 시작했습니다. 이 원정은 누에보그라나다와 베네수엘라의 국경에 위치한 쿠키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메리다를 정복했을 때 그는 도시에서 영웅으로 환영받으며 주민들로부터 '해방자'라 불렸습니다. 1813년 8월 6일, 볼리바르는 카라카스에 입성했습니다. 이로써 베네수엘라 제2공화국의 시대가 시작되었지만, 1814년 12월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1814년 그는 누에보그라나다 정부의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그곳으로 떠났고, 결과적으로 그라나다인들을 지원하는 전투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1815년에는 누에보그라나다를 떠나 처음에는 자메이카에, 이후에는 아이티에 정착했습니다. 자메이카에서 그는 자신의 가장 유명한 문서 중 하나인 자메이카 서한(Letter da Jamaica)을 집필했습니다.
이 문서에서 볼리바르는 혁명의 원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밝히며, 그 원인을 스페인이 아메리카와의 기존 '사회 계약'을 파기했다는 사실과 연결 지었습니다. 또한 남아메리카 각국이 하나의 국가로 통합되는 것이 남아메리카 민족의 주권을 지키는 방법이라고 강조했습니다.

1816년 볼리바르는 베네수엘라를 되찾기 위해 귀환했습니다. 아이티 대통령 알렉상드르 페티옹(Alexandre Pétion)이 제공한 병력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베네수엘라에서 그는 노예들을 해방시키고 앙고스투라를 정복하여 제3공화국을 수립했습니다. 1819년에는 누에보그라나다 해방을 위해 진군하여 8월 7일 보야카 전투(Battle of Boyacá)에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어서 에콰도르, 콜롬비아, 베네수엘라의 영토를 하나로 모은 공화국인 콜롬비아 공화국, 흔히 그란 콜롬비아(Gran Colombia)로 알려진 국가가 선포되었습니다. 그는 생애 내내 페루와 볼리비아의 독립에도 참여했습니다. 페루는 그란 콜롬비아에 가입하도록 초청받기도 했으나, 페루 당국은 이를 거절했습니다.
말년
1819년부터 1830년까지 볼리바르는 그란 콜롬비아의 대통령직을 수행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추진했던 남아메리카 국가들의 영토 통합 프로젝트는 실패로 끝났습니다. 각 지역의 정치적 이해관계와 볼리바르의 통치 방식에 대한 정치 엘리트들의 반발이 이 프로젝트를 좌초시켰습니다.
볼리바르에 대한 압박과 그란 콜롬비아의 방향성에 대한 환멸 속에서 그는 1830년 3월 1일 대통령직에서 사임했습니다. 같은 해 볼리바르는 결핵에 걸렸고, 1830년 12월 17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듬해 그란 콜롬비아는 콜롬비아, 에콰도르, 베네수엘라의 세 나라로 분해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