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혁명이 일어나던 초창기부터 당대 사람들은 혁명과 그 이전 세기의 지적 변동 사이의 연관성을 궁금해했습니다. 혁명은 계몽주의의 딸일까요? 겉보기에는 그렇습니다. 제헌의회의 작업은 철학자들의 저술을 반영하는 듯 보였으니까요. 장 자크 루소가 말한 '일반의지'의 강조, 몽테스키외가 주장한 행정부 권력의 제한, 볼테르가 내세운 관용과 교회 개편, 그리고 경제학자들이 요구한 통상 자유화와 동업조합(길드) 폐지까지 — 그 목록은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깁니다.
구체제 시대의 철학자들
그러나 이 그림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습니다. 루이세바스티앙 메르시에나 콩도르세의 사례에서 보듯, 계몽주의 후기 세대는 확실히 혁명의 편에 서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계몽운동의 전성기를 함께한 세대에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과거 급진적인 사상가로 이름을 날렸던 인물들 중 상당수는 혁명을 강력히 규탄했습니다. 백과전서(Encyclopédie)의 기고자였고 '광신과 무지에 맞선 투쟁'의 선봉장이었던 앙드레 모를레, 그리고 반식민주의·반교권 성향의 베스트셀러 양 인도사(Histoire des deux Indes)의 간행을 주도했던 레날 신부(Abbé Raynal)가 대표적입니다. 1791년 5월, 레날은 제헌의회가 계몽주의 정신을 배신했다고 비난하며 의회를 경악에 빠뜨렸습니다.
철학자들은 검열과 바스티유 감옥행 같은 고통을 제외하면 자신들에게 나름 편안했던 구체제 속에서 살았으며, 그 체제를 전복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더욱이 그들은 역사에 전례가 없던 1789년 혁명이 어떤 모습일지 상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억지스러운 시대착오적 해석을 통해 새 시대의 수호자로 추앙받았습니다. 1791년 볼테르의 팡테옹 안장식이 대표적인데, 만약 제헌의회의 업적을 직접 접했더라도 크게 놀라 외쳤을 이 작가가 '예언자'의 반열에 오른 모순이 벌어졌습니다! 제헌의회 논의를 직접 목격한 무니에(Mounier)의 증언에 따르면, 철학자들의 저술은 의원들이 통과시킨 법령에 권위라는 윤을 입히는 데 일조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우리는 방어하기로 마음먹은 이론을 뒷받침할 논거를 찾기 위해서만 그들의 저작을 참고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