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로폰네소스 전쟁의 배경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이 끝나자마자 스파르타는 페르시아를 상대로 한 승리로 명성이 높아진 아테네의 급성장하는 세력을 경계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이기나와 코린토스의 압박을 받은 스파르타는 페르시아군에 의해 파괴된 성벽의 재건축을 금지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아테네를 막지 못했고, 아테네는 범헬레니크 동맹을 탈퇴하여 델로스 동맹을 새롭게 창설합니다.
스파르타는 이 시점에서 전쟁을 일으킬 뻔했지만 결국 포기했습니다. 몇 차례의 긴장 국면이 있었지만 두 도시의 관계는 기본적으로 원만하게 유지되었습니다. 그러다 462년, 헤일로트(노예 계층)의 대반란 당시 키몬이 이끄는 아테네 지원 부대가 스파르타의 요청으로 파견되었다가 돌려보내지면서 관계가 완전히 파탄됩니다. 친(親)스파르타 성향의 정치가 키몬이 도편 추방당하면서 양 도시의 단절은 더 이상 되돌릴 수 없는 것이 되었습니다.
갈등의 심화와 전쟁 직전까지
실질적인 적대 행위는 457년 코린토스의 호소로 시작되었습니다. 이후 양 도시는 승패를 거듭하며 대립했고, 451년에는 5년간의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지만 관계는 여전히 긴장 상태였습니다.
446년에는 메가라와 에우보이아의 반란이 갈등을 다시 불러일으켰습니다. 동맹 도시들을 이끈 스파르타군은 아티카를 유린했는데, 왕 플레이스토아낙스는 공세를 끝까지 밀고 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뇌물 수수 혐의를 받아 추방당하기까지 했습니다. 마침내 433년 코르키라 사건이 발발하면서 본격적인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막이 오릅니다.
전쟁 개시를 둘러싼 스파르타 내부의 갈등
아테네가 '빛나는 2위'의 지위를 넘어 스파르타를 추월할 것이라는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모든 스파르타인이 전쟁에 열광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장기전이 될 것이 분명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물론 당시 아무도 이 전쟁이 무려 27년이나 지속될 것이라고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감독관(에포로스) 스테넬라이다스는 즉각적인 전쟁을 주장했지만, 아르키다모스 왕은 이에 맞섰습니다. 민회의 표결 결과도 불확실하여 특별한 절차인 '이동 투표' 방식이 동원될 정도였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스파르타가 440년, 즉 강력한 해군력을 보유한 사모스가 동맹에서 이탈하기 전에 전쟁을 시작했다면 훨씬 유리했을 것입니다. 또한 투키디데스의 서술과 달리, 양 도시 간의 마지막 협상이 평화를 구할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페리클레스의 전략과 스팍테리아의 굴욕
전쟁은 실제로 매우 길어졌습니다. 페리클레스는 아티카를 포기하고 스파르타의 반복적인 약탈에 내맡기는 대신, 주민들을 장성(Long Walls)으로 보호되는 아테네 시내로 수용하는 전략을 택했기 때문입니다.
425년에는 스파르타에게 굴욕적인 패배가 닥칩니다. 스팍테리아 섬에서 무려 120명의 스파르티아타(동등자), 대부분 스파르타 명문가 출신들이 포로로 잡힌 것입니다. 스파르타는 자국 중장보병들을 되찾기 위해 함대를 넘겨야 했습니다. 이것은 스파르타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겨준 사건이었습니다. '동등자들'이 최후까지 싸우지 않고 항복하는 모습이 처음으로 목격된 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421년, 니키아스 평화가 체결되면서 일단의 숨통이 트입니다.
니키아스 평화의 붕괴와 전쟁의 재개
그러나 긴장은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418년에는 양 도시가 자국 영토 밖인 만티네이아에서 충돌하기까지 했습니다. 아테네는 스파르타가 조약을 파기했다고 판단했고, 전쟁은 415년에 재개됩니다.
아테네는 시칠리아 원정을 감행했지만 이는 참담한 실패로 끝났습니다. 델로스 동맹 소속 이오니아 도시들의 이탈이 이어지면서 주도권은 스파르타로 넘어갔고, 마침내 404년 포위 공격에 못 이긴 아테네가 항복합니다.
전쟁의 종식과 아테네의 운명
승전국 스파르타는 아테네에게 장성을 양쪽으로 각각 10스타디온(약 1.8km) 구간만큼 철거할 것을 명령하고, 펠로폰네소스 동맹 가입을 강요했습니다.
삼십인의 참주와 스파르타의 내부 대립
그러나 스파르타는 아테네에 어떤 정치 체제를 세워야 할지 놓고 고민에 빠집니다. 민주정을 종식시켜야 한다는 점에는 모두가 동의했지만, 스파르타의 감시 아래 있는 과격한 과두정을 세울 것인가, 아니면 스파르타 주둔군 없이 온건한 과두정을 유지할 것인가가 문제였습니다.
아테네 정복의 최대 공신인 리산드로스 왕은 삼십인의 참주 정권을 강제로 세웠지만, 다른 왕 파우사니아스 1세는 삼십인을 실각시키고 그들이 추종자들과 함께 도피하도록 내버려두며 아테네에 잔류한 온건파 과두정치가들을 지지했습니다. 그러나 파우사니아스는 스파르타로 귀환하자마자 재판에 회부되었고, 무죄 판결을 받은 지 8년 후, 아테네가 다시 스파르타에 맞서 무기를 들었을 때 유죄를 선고받고 말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