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세릭, 반달 왕국을 세운 야망의 정복자
젠세릭(Genséric, Geiseric, 389년경 ~ 477년 1월 25일)은 427년부터 477년 사망할 때까지 반달족과 알란족의 왕(Rex Wandalorum et Alanorum)으로 군림한 인물이다. 그는 하스딩(Hasding) 부족 출신의 반달족 왕 고데기셀(Godégisel)과 알란 출신 여인 하브라(Habbra) 사이에서 태어난 서자였다.
아프리카 침공의 배경: 보니파시우스와의 밀약
당시 로마 제국령 아프리카의 총독 보니파시우스(Boniface)는 스페인 체류 중에 반달족 공주와 결혼했는데, 그의 아내 펠라지에(Pélagie)가 수행원들과 함께 아리우스파 신봉자인 반달인 다수를 데려오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황후는 이 소식을 접하고 교회의 압박에 밀려 보니파시우스를 직무에서 해임하고 로마로 소환했으나, 그는 이를 거부했다.
자신에 대한 원정 계획이 있다는 소식을 들은 보니파시우스는 스페인으로 건너가 반달족에게 아프리카 분할을 제안했다. 그는 당시 반달족의 지도자였던 곤데리크(Gonderic)와 협정을 맺어, 반달족이 세 마우레타니아(Mauretania Tingitana, Caesariensis, Sitifensis) 지역을 차지하고 자신은 나머지 영토를 유지하기로 했다. 양측은 또한 어떠한 침략에도 상호 원조하기로 약속했다.
북아프리카 도착과 진격
427년, 반달족 부족들과 알란족 집단이 남부 스페인(안달루시아)에 주둔하고 있던 시기에 젠세릭은 이복형 곤데리크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며 이 협약을 실행에 옮겼다. 타리파(Tarifa)를 떠난 그는 고트족, 알란족 및 각종 용병을 포함해 겨우 15,000명 정도의 전사를 거느린 총 80,000명 규모의 민족 전체를 이끌고 세우타(Ceuta)에 상륙했다. 이 대집단은 안달루시아(Vandalusia)라는 이름의 근거지를 영영 버리고, 보니파시우스가 일부 제공한 선박을 통해 지브롤터 해협을 건넜다.
반달족은 마우레타니아 연안 전역을 약탈한 뒤, 서쪽 어느 도시에도 머물지 않은 채 누미디아 방면으로 서서히 진격했다. 로마의 지배와 착취에 지친 베르베르인들이나, 젠세릭의 군대가 로마인들을 몰아내는 데 도움을 줄 것이라 기대한 이들은 대거 반달족 진영에 합류했다.
그러나 이러한 진격이 보니파시우스가 곤데리크와 합의한 한계를 넘어서자, 보니파시우스는 항의했다. 하지만 젠세릭은 모든 요청과 위협에 귀를 막고 진군을 멈추지 않았다.
히포 공방전과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죽음
보니파시우스와의 첫 전투에서 승리한 반달족은 '급류처럼' 속주 전역으로 번져 나갔다. 저항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결코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반달족 병사 하나가 죽으면 마을이나 도시 하나가 파괴되는 식이었으며, 포로들은 성별·연령·신분을 불문하고 숨겨진 보물의 행방을 캐묻기 위해 잔혹한 고문을 받았다고 한다. 도시를 포위할 때는 포로들을 성벽 앞에서 대량 학살해 시체에서 발생하는 역병이 도시 내부로 번지도록 만들었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보니파시우스는 히포(현 안나바)의 성벽 안에 갇혀 농성했고, 반달족은 그 도시를 빈틈없이 포위해 곧 기근이 닥치게 만들었다. 바로 이 도시에서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430년 8월 28일 세상을 떠났다. 14개월간의 공방 끝에 젠세릭은 군대를 물렸다.
황후 갈라 플라키디아는 콘스탄티노플에서 아스파르(Aspar)가 이끄는 강력한 군대를 파견했다. 히포에서 풀려난 보니파시우스는 동로마군과 합류했으나, 젠세릭은 431년 이들을 격파하는 데 성공했다. 이듬해 황후의 명으로 콘스탄티노플로 소환된 보니파시우스는 원정 도중에 생을 마감했다.
히포 조약(435년): 제국 연합체로서의 지위
결국 젠세릭은 435년 2월 11일 체결된 히포 조약을 통해 다음과 같은 특권을 얻어냈다.
- 제국의 연합민(federated member) 지위 획득
- 세 마우레타니아와 갈라마(현 구엘마)까지의 누미디아 일부 지역에 대한 자유로운 점유
그 대가로 젠세릭은 매년 공납을 바치고, 자신의 귀족과 친척 중에서 인질을 선발해 황실 궁정에 보내야 했다. 그러나 이 협정은 젠세릭에게 있어 일시적인 숨통일 뿐이었다. 그에게 진정한 목표는 카르타고의 장악, 그리고 그것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지중해의 지배였다.
카르타고 함락(439년)
439년 10월 29일, 젠세릭은 카르타고를 기습 공격하여 큰 저항 없이 함락시켰다. 모든 주민들은 금·은과 귀중품을 정복자에게 바쳐야 했다. 반면 이교도 유목민들과 도나투스파(Donatist) 농민들에게는 완전한 종교적 자유를 허용했고, 가톨릭 신앙과 로마 문화가 가장 강했던 도시들의 성벽은 철거되었다. 콘스탄티노플은 유럽의 문제에 신경을 쓰느라 거의 대응하지 못했고, 결국 442년 그의 정복을 승인했다.
로마 약탈과 지중해 제패
젠세릭은 455년 6월 로마를 약탈하고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를 유린한 뒤, 막대한 전리품과 함께 발렌티니아누스 황제의 미망인(그는 그녀와 재혼했다)과 그녀의 두 딸을 데리고 카르타고로 돌아갔다. 이후 트리폴리타니아, 코르시카, 사르데냐, 시칠리아, 발레아레스 제도, 이스키아 섬을 정복하며 지중해의 실질적 지배자가 되었고, 동서 로마 황제들에게 굴복을 강요했다.
특히 로마 약탈은 교황 레오 1세와 맺은 합의에 따라 체계적으로 진행되었다. '반달'군대(상당수가 베르베르인이었다)는 455년 6월 2일부터 16일까지 15일간 약탈을 허락받았지만, 학살·강간·성당 파괴·방화 등은 삼가야 했다. 알라리크와 서고트족의 로마 약탈로부터 45년 후, 반달족은 도시에 큰 피해를 주지 않고 입성했으나 도시를 구역별로 하나씩 '샅샅이' 뒤져 상당한 전리품을 수확했다.
일부 로마인들은 특수 기술 때문에, 또는 높은 사회적 지위 때문에 납치되었다. 젊은 로마 공주 리키니아 에우독시아(Licinia Eudoxia)는 그중 한 사람으로, 7년간 카르타고에 유폐된 후 젠세릭의 아들 후네리크 공자와 결혼했다. 당시 고트족의 약탈을 면했던 귀중품들은 오스티아 항에 정박한 반달족 선박에 실려 카르타고로 향했다. 카피톨리움의 금판마저 도굴되었다. 무엇보다 황제 티투스가 예루살렘을 약탈할 때 가져온 메노라(Menorah, 유대교 촛대)는 410년 8월의 약탈 때도 온전히 보존되어 있었는데, 이번에는 발견되어 함께 선적되었다. 이러한 기세를 몰아 젠세릭은 468년경 비잔틴(동로마) 함대마저 격파했다.
말년과 죽음
명목상 로마의 연합체였지만 사실상 독립적이었던 젠세릭은, 카르타고 입성 이후 완전한 주권자로서 자신의 왕국을 통치했다. 476년 서로마 제국이 공식적으로 소멸하자, 이탈리아의 야만인 용병 지도자이자 새로운 실권자인 스키리족(또는 헐룰리족) 출신의 오도아케르(Odoacer)가 그를 모든 영토의 왕으로 상징적으로 승인했다.
그의 뒤를 이은 어떠한 후계자도 젠세릭의 업적에 필적하지 못했다. 노년의 반달족 왕은 80대의 나이로 477년 1월 25일 자연사했으며, 우티카(Utica)에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