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로마 귀족 파트리키(Patricii): 기원, 특권, 그리고 평민과의 갈등

파트리키(Patricii)는 라틴어 '파테르(pater)', 즉 '아버지'에서 유래한 용어로, 출생에 따라 로마의 상류 계급인 귀족 신분에 속하며 수많은 특전을 누리던 시민들을 의미합니다. 이들은 로마 사회에서 평민 계급인 플레브스(plebs)와 끊임없이 대립하는 관계에 있었습니다.

파트리키의 기원

고대 로마의 전통에 따르면, 최초의 파트리키는 로마 건국 당시 자리했던 백 개 가문의 후손이라고 전해집니다. 이들 가문의 우두머리는 '파트레스(patres)'라 불렸으며, 로물루스와 그의 후계자들이 이들을 선발하여 원로원을 구성하게 했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율리아 씨족(gens Julia)의 후손입니다. 하나의 겐스(gens, 씨족)는 여러 분가와 가문으로 나뉘며, 각 가문은 '파밀리아(familia)'의 모든 구성원, 즉 아내와 자녀, 노예와 하인들을 절대적으로 통솔하는 '파테르 파밀리아스(pater familias)'가 이끌었습니다.

전설상 파트리키는 로물루스의 동료들의 후손으로 여겨지지만, 실제 역사적으로 보면 이들은 기원전 510년 공화정 혁명의 주역들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공화정 초기에는 파트리키가 국가를 지배했습니다.

초대 원로원 의원들의 후손은 원로원 의원 신분이 아니더라도 파트리키라는 이름을 유지했습니다. 또한 기원전 504년경 클라우디우스(Claudii) 가문처럼 강력한 외지 가문들이 파트리키의 지위를 얻어 로마에 정착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파트리키 가문들은 점차 사라졌고, 대신 '노빌리타스(nobilitas)'라고 불리는 새로운 귀족 계층이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파트리키와 플레브스(평민)

파트리키는 오랫동안 최고 관직에 출마할 수 있는 유일한 계급이었으며, 결혼 역시 같은 계급 내에서만 맺는 것이 원칙이었습니다. 이러한 불평등은 젊은 로마 공화정을 피로 물들인 끝없는 갈등의 씨앗이 되었고, 그 결과는 다음과 같은 변화로 이어졌습니다.

  • 평민의 이익을 옹호하는 전속 관직인 호민관(tribunus plebis)의 창설
  • 파트리키와 플레브스 간 통혼(혼인)의 허용
  • 그동안 파트리키만 독점하던 관직과 공직에 평민의 진출 인정

두 집단이 적대적인 관계였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연결되는 고리도 존재했습니다. 파트리키는 도움을 청하는 평민에게 보호를 베풀었고, 이렇게 보호를 받는 평민들은 '클리엔스(cliens)'라 불리며, 그 대가로 언제든 후원자를 위해 헌신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했습니다. 이러한 관계는 로마 사회를 관통하는 '클리엔텔라(clientela)' 제도로 발전했습니다.

마요룸 겐티움(Majorum gentium)과 미노룸 겐티움(Minorum gentium)

로마 역사에서 파트리키는 세 차례에 걸쳐 창설되었습니다.

  • 1차: 로마 건국 당시
  • 2차: 티투스 타티우스가 이끄는 사비니인들이 로마에 편입될 때
  • 3차: 툴루스 호스틸리우스 왕이 알바 롱가 주민들을 로마로 이주시켰을 때

1차와 2차에 창설된 파트리키는 '마요룸 겐티움(Majorum gentium, 위대한 씨족)'이라 불렸고, 3차 창설분은 '미노룸 겐티움(Minorum gentium, 후발 씨족)'이라 칭해져 서열이 구분되었습니다.

로마 공화정의 파트리키 가문들은 양자 입적에도 불구하고 점차 단절되었으며, 제정기 4세기 무렵에는 단 한 가문도 남아 있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탈리아에서의 명맥

흥미롭게도 '파트리치오(Patrizio)'라는 명칭은 이탈리아에서 귀족 작위의 하나로 오늘날까지 남아 있습니다.

중세 이탈리아 도시에서 파트리치오는 상업 활동으로 축적한 재산, 혹은 혈통과 정략적 연결을 통해 특별한 권위를 누린 시민 집단의 일원을 지칭했습니다. 이들은 코무네(commune) 제도의 실질적인 주인공이었습니다. 다만 중세의 모든 파트리치오가 귀족은 아니었고, 반대로 모든 귀족이 파트리치오였던 것도 아니라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