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키케로의 성장과 명성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기원전 106년 이탈리아의 아르피눔에서 태어났습니다. 로마로 올라와 법률과 철학을 공부하던 그는 포룸에서 당대 최고의 웅변가로 꼽히던 안토니우스와 크라수스의 강연을 들을 수 있는 귀한 기회를 얻었습니다. 이후 그는 법무관(프라이토르)에 이르기까지 차근차근 관직을 올라갔지만, 진정으로 그의 화려한 경력을 연 것은 바로 '섹스투스 사건'이었습니다.
기원전 81년, 키케로는 섹스투스 로키우스 아메리누스의 변호를 맡았습니다. 섹스투스는 홀로 유죄를 받아 부친살해죄에 따른 혹독한 형벌을 받을 위기에 처해 있었지만, 키케로는 상대측이 꾸민 모략의 실체를 낱낱이 폭로하며 무죄를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재판이 끝날 무렵, 판사들은 그의 웅변에 매료되어 섹스투스를 더 이상 유죄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키케로는 웅변가로서의 뛰어난 재능을 과시했고, 로마 시민들의 인정과 사랑을 한몸에 받게 되었습니다.
키케로가 말하는 수사학
키케로에 따르면 진정한 웅변가란 vir bonus dicendi peritus, 즉 '말을 잘 다루는 선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교양과 지성, 재능을 갖추지 못한 자의 연설은 아무리 화려해도 헛된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웅변을 세 가지 장르로 나누었습니다. 의사결정을 촉구하는 '심의 연설', 정의의 승리를 추구하는 '법정 연설', 그리고 대상을 칭찬하거나 비난하는 '시연 연설'이 그것입니다. 수사학은 본래 인간이 다른 생물과 구별되는 우월성을 드러내는 학문으로, 그 교육의 중심지는 아테네였습니다.
키케로는 항상 치밀하게 준비하고 완벽한 구조를 갖춘 연설을 선보였으며, 청중을 설득하고 감동시키며 매료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정치 무대에서의 키케로
섹스투스 사건 2년 후, 키케로는 문화와 웅변의 본산인 그리스로 건너가 당대 최고의 웅변가들에게 수사학을 배웠습니다. 로마로 돌아온 그는 쿠르수스 호노룸(cursus honorum, 관직 승진의 서열)을 밟기 시작해 기원전 75년 재무관, 기원전 69년 조영관, 그리고 3년 뒤에는 법무관에 임명되었으며, 변호사로서의 활동도 병행했습니다. 작위 없이 태어난 '호모 노부스(homo novus, 신귀족)'였던 키케로는 이제 귀족의 반열에 올라 집정관이라는 최고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를 더욱 유명하게 만든 결정적 사건이 바로 '베레스 스캔들'입니다.
재판은 기원전 70년 8월 5일에 열렸습니다. 키케로의 상대는 귀족 출신의 베레스였고, 귀족에 대한 그의 공격은 곧 부유층을 뇌물로 무죄로 만들어 온 원로원에 대한 도전이기도 했습니다. 패색이 짙어진 것을 깨달은 베레스는 결국 도망쳤습니다. 키케로의 승리는 대단했고, 그는 단축된 재판에서 다 말하지 못한 연설문들을 직접 출판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키케로는 '정의와 합법성을 걱정하는' 보누스 비르(bonus vir)로 자리매김했습니다. 민중파(populares)와 원로원 보수파(optimates) 사이에서 갈리던 그는 결국 폼페이우스 진영에 합류했고, 주로 옵티마테스의 지지로 집정관에 당선되어 민중과 원로원 사이의 균형을 잡는 정치 노선을 펼쳤습니다.
그러나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집정관 선거에서 두 번이나 낙선한 카틸리나는 키케로 암살을 계획했고, 키케로는 크라수스의 밀고 덕분에 목숨을 건졌습니다. 기원전 63년 11월 8일, 키케로는 음모와 그 배후를 고발하는 유명한 연설 '카틸리나 제1반박'을 원로원에서 낭독했습니다. 카틸리나는 로마를 떠나 도망쳤고, 그의 공범들은 처벌받았습니다.
키케로의 최후
기원전 58년, 키케로는 카틸리나의 공범들을 재판 없이 처형한 책임을 물어 추방당했습니다. 군벌들이 더 이상 외면하는 그의 '보수적 중도주의'는 로마 정치에서 힘을 잃어갔고, 정치 일선에서 밀려난 그는 저술 활동에 몰두했습니다. 철학 공부를 다시 시작한 그는 『웅변가에 관하여』(De Oratore), 『국가론』(De Republica), 『법률론』(De Legibus) 같은 철학 대화편을 잇달아 출판했습니다.
기원전 44년, 키케로는 로마로 돌아와 안토니우스에 맞섰고, 그를 규탄하는 연설집 '필리피카이'를 발표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동맹이라 믿었던 카이사르의 양자 옥타비아누스가 안토니우스와 손을 잡으면서 운명은 기울었습니다. 기원전 43년 12월 7일, 키케로는 끝내 암살당하고 말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