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45년 5월 11일,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의 운명을 건 격전지였던 퐁트누아(Fontenoy). 새벽 6시를 조금 앞두고 밤 안개가 걷히기 시작하자, 컴벌랜드 공작(Duke of Cumberland)은 부대에 퐁트누아로 전진할 것을 명령했고, 동맹인 네덜란드군은 앙투앵(Antoing)을 공격하기로 되어 있었다. 이로써 유명한 퐁트누아 전투의 막이 올랐다.
놓쳐버린 결정적 기회
연합군은 즉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네덜란드군은 프랑스군의 산탄포 세례에 큰 타격을 입고 곧바로 후퇴했으며, 이후 하루가 끝날 때까지 다시 전장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반면 영국군은 프랑스 진형의 중심부를 끊임없이 압박했다. 그러나 이러한 공세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컴벌랜드 공작은 잉골즈비 경(Lord Ingoldsby)이 지휘하는 하이랜더 연대로 배리 숲(Barry Wood)을 점령하라고 명령했다. 이 어려운 기동이 성공한다면 전투의 귀추를 좌우할 수도 있는 국면이었다.
하지만 프랑스 연대들이 이 공세를 간신히 막아내면서 프랑스 왕의 군대는 운명의 도움을 받았다. 더욱이 잉골즈비는 숲속에서 브라상(Brassins) 분견대와 마주쳤는데, 이를 대규모 병력으로 착각하고 컴벌랜드에게 돌아가 포병과 병력의 증원을 요청했다. 영국군은 바로 눈앞의 기회를 놓쳐버린 것이다. 오전 8시 30분, 전장의 주도권은 여전히 프랑스군의 손에 남아 있었다.
정면 돌파의 선택
실패를 냉정히 되돌아본 컴벌랜드는 다시 병력을 전장에 투입했다. 그는 프랑스 진형의 양익이 견고하게 방어되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한 뒤, 정면 공세를 선택했다. 바로 작센(Saxe) 원수가 방책과 포대를 구축하지 못한 지점이었다.
그리고 갑자기, 프랑스 근위대들의 시야에 적의 전초부대가 나타났다. 양군을 가르는 완경사를 넘어 헐떡이며 올라오는 모습이었고, 젖은 지면으로 인해 매우 고된 행군 끝에 몇 문의 대포가 이동했으며, 그 뒤를 15,000명의 영국·스코틀랜드·하노버 보병이 빈틈없이 따랐다. 프랑스 진영에는 경악이 번졌다! 단 하나의 구호가 울려 퍼졌다. "영국군의 대포를 빼앗아라!" 그러나 영국군은 흔들리지 않고 전진을 계속했다. 마침내 화망이 열렸고, 약 60명이 쓰러졌지만 대열은 즉시 재편성되었다.
"먼저 쏘시오" – 명예와 전술 사이
이제 캠벨(Campbell) 연대, 로열 스코츠(Royal Scots) 연대, 그리고 프랑스 근위대 연대가 서로 마주 보게 되었다. 프랑스 진선에서 목소리가 들리는 거리까지 다가온 헤이 경(Lord Hay)은 모자를 손에 들고, 아테로슈 백작에게 "당신의 사람들"부터 먼저 발사해 달라고 우아하게 '청'을 고했다. 볼테르가 생생히 회고한 이 유명한 일화는 기사도 정신에서 비롯된 것이라기보다는 무기의 특성에 대한 냉철한 계산에서 나온 것이었다. 당시 머스킷의 재장전에 필요한 시간이 매우 길었기 때문에, 먼저 발사한 쪽은 오랫동안 어떠한 기동도 할 수 없는 취약한 상태에 놓이게 되고, 그 틈을 상대가 역으로 조준하는 데 활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아테로슈 백작이 선수를 내주지 않자, 영국군이 먼저 발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이론상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영국군은 프랑스 및 스위스 연대를 향해 놀라운 신속함으로 돌진했고, 프랑스 진형의 중심은 여러 곳에서 흔들리며 무너지기 시작했다. 컴벌랜드 공작이 이 팽팽한 전투의 두 번째 국면을 가져간 것이다.
무너져 가는 프랑스 진선
이제 영국군의 진격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없어 보였다. 그들은 마치 평소 훈련이라도 하듯 침착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잠시 후 그들은 퐁트누아 마을 뒤 참호에 자리 잡은 프랑스 진지를 완전히 압도했다. 볼테르의 기록에 따르면, "처음 세 개 사단으로 이루어졌던 이 부대는 길고 두터운 하나의 대열이 되었고, 그 질량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더한 용맹함 덕분에 거의 흔들리지 않는 존재가 되었다." 오브테르(Aubeterre) 연대는 크게 궤멸되었고, 프랑스 진선은 곧 무너질 듯 위태로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