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쥘 마자랭: 프랑스 절대왕정의 설계자

쥘 마자랭(이탈리아어: 줄리오 마자리노, 1602~1661)은 마자랭 추기경으로 더 잘 알려진 인물로, 뛰어난 외교관이자 정치가로서 먼저 교황청을 섬겼고 이후 프랑스 왕들을 보좌했다. 그는 리슐리외 추기경의 후계자가 되었다.

출생과 가문

마자랭 추기경 줄리오 마자리노는 1602년 7월 14일, 당시 스페인 지배하에 있던 아브루초 지방 페시나(이탈리아 남동부)에서 태어났다. 사실 그의 부모는 로마에 거주하고 있었고 그도 그곳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아버지 피에르는 가끔 처남인 부팔리니 신부를 방문하곤 했는데, 1602년 그 여정 중 아내가 임신한 상태에서 무더위를 견디지 못해 로마로 돌아갈 수 없게 되자 페시나에서 첫아들 쥘을 낳았다. 당대 역사가들에 따르면 어머니 오르텐시아는 머리가 난 채로 두 개의 이빨을 가진 아들을 낳았는데, 이는 훗날 큰 복을 예고하는 징조로 여겨졌다. 추기경은 훗날 이 일화를 자주 활용했다.

추기경의 아버지 피에르는 시칠리아의 카스텔 마자리노에서 태어난 줄스의 아들이며, 이곳에서 '마자랭'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추기경의 할아버지는 부유한 장인(일부 역사가들은 파산했다고 함)으로, 아들 피에르를 학교에 보낼 수 있었다. 피에르는 학업에 뛰어나 공증인이 되어 소송 몇 건을 맡을 만큼 학식을 갖췄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가재도구를 처분하고 콜론나 대장의 추천서를 들고 로마로 향했다. 이 추천서 덕분에 피에르는 대장의 시종이 되었고, 나중에는 영지 관리를 맡게 되었다. 능숙하고 신중한 처신으로 주인의 신임을 얻어 가족을 부유하게 만들었으며, 아들 추기경 마자랭이 화려한 출세를 한 뒤에도 항상 콜론나 가문의 은혜 덕분이라며 감사해했다.

대장은 하인들이 결혼하길 바랐다. 아내를 맞이하기로 한 피에르에게 대장은 대녀이자 움브리아 치타 디 카스텔로의 명문가 출신인 오르텐시아 부팔리니를 아내로 주었다. 그녀는 미모와 덕을 겸비했고 지참금도 넉넉했다. 슬하에 두 아들과 네 딸을 두었는데, 장남이 할아버지의 이름을 따 쥘이라 불렸으며 훗날 추기경이 된다.

교황청 입성

1627년, 30년 전쟁의 와중에 북이탈리아에서 만토바 계승 전쟁이 발발했다. 한편에는 페르디난트 2세 황제, 사보이 공작 카를로 에마누엘레 1세, 구아스탈라의 페르디난트 2세(기벨파 공위 계승자)가, 다른 편에는 프랑스 왕 루이 13세가 뇌브르 공작 샤를 드 곤자가(겔프파 계승자)를 지원하며 맞섰다. 우르바노 8세 교황도 발텔리나에 군대를 파견했다. 쥘은 책을 던져두고 보병 대위 직을 얻어 참전했다. 그의 부대는 로레토와 안코나에 주둔했다. 그는 책으로만 전쟁을 알았지만, 직무 수행에서 탁월한 지성과 병사들을 통제하는 재능을 보였다.

당시 콜론나 대장의 딸 안나 콜론나가 우르바노 8세의 조카 타데오 바르베리니와 혼인했다. 이 인연으로 마자랭의 옛 주인 지롤라모가 볼로냐 대주교직과 추기경직을 받았다. 그가 교황 특사로 몬페라토에 파견되어 프랑스와 스페인의 강화를 논의할 때, 쥘을 비서로 수행하게 했다.

양측은 전투 태세를 갖췄으나 교황 특사는 열성적으로 평화를 중재했다. 비서 마자랭은 진영을 오가며 조약 체결을 재촉했다. 그는 스페인 대표 산타크루스 후작이 군대 손실을 극도로 두려워하며 타협을 간절히 원한다는 점을 간파했다. 이 약점을 이용해 프랑스군의 전력을 과장하며 스페인 장군을 압박했다.

마자랭의 협상은 1631년 4월 6일 케라스코 조약으로 결실을 맺었다. 황제와 사보이 공작은 만토바와 몬페라토 일부를 샤를 드 곤자가에게 인정했고, 특히 포 강 유역의 관문인 피네롤 요새의 프랑스 점령을 용인했다. 이 성과는 루이 13세와 리슐리외 추기경에게 큰 만족을 주었고, 리슐리외는 마자랭을 '무궁무진한 계책과 군사적 책략에 능한 인물'로 평가하며 직접 만나고 싶어 했다. 그는 마자랭을 파리로 불러들였고, 루이 13세의 초상화가 달린 금목걸이와 보물, 값진 검을 선물하며 후하게 대우했다.

프랑스와의 첫 인연

마자랭은 1634년 아비뇽 부대리, 이어 1634~1636년 파리 교황 대사로 부임했다. 친프랑스적 성향이 스페인에 미움을 사 아비뇽으로 쫓겨났고(1636), 리슐리외의 노력에도 추기경 서임을 막혔다.

리슐리외는 노쇠로 인한 부담을 느끼면서도 마자랭이 국정을 도울 적임자라 판단했다. 로마를 잠시 다녀온 마자랭을 곁에 두고 여러 임무를 맡겼으며, 훌륭히 수행하자 루이 13세에게 소개했다. 왕은 그를 총애하여 왕궁에 머물게 했다.

도박에 능했던 마자랭은 어느 날 큰돈을 따서 금덩어리 산을 쌓아놓았다. 궁인들이 구경하러 몰려들었고 왕비 안 도트리슈까지 나타났다. 마자랭은 전 재산을 걸고 다시 이겼다. 그는 왕비의 행운 덕분이라며 5만 금 에퀴를 바치고 나머지는 궁정 여인들에게 나눠주었다. 왕비는 처음엔 사양했으나 결국 받아들였고, 며칠 뒤 마자랭은 준 것보다 훨씬 많은 선물을 받았다. 그날 이후 그는 왕과 궁정, 특히 훗날 섭정이 될 왕비의 총애를 한 몸에 받게 되었다.

마자랭은 로마의 아버지에게 거액과 보석 상자를 보내 세 자매의 지참금으로 쓰게 했고, 왕실의 총애야말로 자신이 평생 갈망하던 추기경직을 얻는 가장 확실한 길임을 확신했다. 리슐리외도 그를 아껴 추기경직을 약속했으나 차일피일 미뤘다. 어느 날 연 3만 에퀴 수입의 주교직을 제안했으나, 더 큰 야망을 품은 마자랭은 정중히 거절했다. 오랫동안 기다리다 지쳐 1636년 이탈리아로 돌아가 교황의 조카 안토니오 추기경을 섬기며 추기경직을 노리기로 했다.

프랑스 왕정 봉사

1639년 4월 프랑스인으로 귀화한 마자랭은 파리로 돌아와 리슐리외에게 자신을 바쳤다. 1640년 12월 사보이 왕자들을 프랑스 편으로 끌어들이는 외교적 쾌거를 올렸고, 이듬해 교황으로부터 추기경직을 받았다. 생마르와 불로뉴 공작의 음모 사건 때 불로뉴 공작은 세당을 넘기는 조건으로 사면받았는데, 마자랭이 협약에 서명하고 직접 세당을 점령했다.

1642년 12월 5일, 리슐리외가 사망한 다음 날 마자랭은 리슐리외의 천거에 따라 국무 수석 대신에 임명되었다.

리슐리외의 죽음부터 루이 13세의 죽음까지 마자랭은 오늘날로 치면 로비 활동을 벌였다. 왕비의 종교적 측근 모두에게 접근해 자신이 리슐리외의 적임자임을 각인시켰고, 경건한 안 도트리슈가 수상 선임 자문을 구할 때 모든 조언자가 '마자랭 추기경!'을 외치게 만들었다.

이에 1643년 루이 13세 사후, 어린 루이 14세를 대신해 섭정이 된 안 도트리슈는 마자랭을 수석 대신으로 임명했다(두 사람은 비밀리에 연인 관계였다). 1646년 3월에는 '왕과 앙주 공작의 신변 및 통치 총감' 직함도 맡았다.

권력을 잡자마자 '중요인물 당파(카발 데 임포르탕)'의 음모(1643)에 직면해 암살 시도가 있었으나 미수에 그쳤다.

30년 전쟁을 종식시킨 베스트팔렌 조약(1648) 등 외교·군사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재정난이 심화되어 마자랭의 중과세 정책은 큰 반발을 샀다. 그 중 하나가 1648년 '의회 프롱드'를 촉발했다. 파리는 왕정 군대에 포위되었고, 파리 근교 마을들은 약탈·방화·강간 등 수탈을 당했다. 파리가 굴복하지 않자 1649년 4월 1일 생제르맹 화약이 체결되었으나 잠시의 휴전일 뿐이었다.

이어서 1650~1652년 '왕족 프롱드'가 일어났다. 보상과 이권을 요구하던 콩데 공작이 체포되면서 마자랭의 권력욕과 충돌한 것이다. 마자랭은 두 차례 망명길에 올랐으나(1651, 1652), 안 도트리슈와 위그 드 리옹(1611~1671), 미셸 르 텔리에(1603~1685) 등 충신들을 통해 국정을 계속 지휘했다. 파리 근교는 군대와 병사들이 퍼뜨린 장티푸스, 무더운 여름이 겹쳐 인구의 최소 20%가 사망하는 참상을 겪었다. 피로와 지친 민심은 왕의 파리 귀환을 환영하게 만들었고, 이후 마자랭도 복귀했다.

마자랭에 대한 비판은 그의 이탈리아 출신과 불분명한 가문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절대왕정 완성에 따른 가혹한 증세(플랑드르, 카탈루냐, 이탈리아 전쟁을 위한 타이유 세 등)가 핵심이었다. 모든 반대를 진압한 그는 1661년 3월 9일 뱅센 성에서 오랜 병끝에 사망할 때까지 수석 대신직을 지켰다.

죽기 이틀 전, 국무회의 세 대신 미셸 르 텔리에, 니콜라 푸케, 위그 드 리옹을 불러 왕에게 신임하라고 당부했다. 하지만 이튿날 콜베르의 조언으로 푸케가 지나치게 야심적이라 판단해 말을 바꿨다. 왕에게 푸케를 경계하고 콜베르를 재무 총감으로 기용하라고 권했다.

개인적 부의 축적

집권 초기부터 마자랭은 국고와 사재를 혼용하며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관직 매매로 수많은 '뇌물'을 챙겼고, 친분 있는 은행가들의 파산을 틈타 프롱드 때 흩어진 장서를 싸게 되사들이고 티치아노, 카라바조, 라파엘로의 작품, 조각, 메달, 보석 등을 수집했다.

재산이 불어나자 장바티스트 콜베르를 고용해 자산을 관리하게 했다.

이러한 탐욕은 파리 노동자들이 만든 풍자 노래 '마자리나드'를 낳았다. 이들은 마자랭이 챙긴 뇌물에 항의하며 노래를 불렀다.

최후

마자랭은 1661년 사망했다. 당시 프롱드 반란이 끝난 지 8년 이상이 지나 있었고(향년 53세), 그는 권좌에서 생을 마감했다.

유산

정치적 유산 외에도 마자랭 추기경은 3,500만 리브르의 거액을 남겼다. 그중 800만 리브르는 현금으로, 당시 세계 최대 은행이던 암스테르담 은행의 현금 보유액과 맞먹었다. 프롱드 때 전 재산을 잃었던 그는 1652년부터 죽기까지 9년도 안 되는 사이, 섭정 왕비로부터 수여받은 막대한 수의 세속·성직 관직, 국고 자금 투기, 화폐 가치 조작과 회수(예: 1659년 솔로뉴의 '나막신 제조공 반란'은 그들이 가진 유일한 화폐인 리아르 회수에 반발한 가난한 농민들의 봉기였다), 군수품 납품 이권 독점 등을 통해 이 부를 쌓았다. 당대 회고록 작가들(왕비의 친구 모트빌 부인 등)의 증언과 콜베르 서간집(피에르 클레망 편, 1861, 10권), 구베르의 『마자랭』 19장, 데세르의 『콜베르, 독사』(2000, 63~65쪽) 등 수많은 자료가 이를 뒷받침한다. 앙시앵 레짐 하에서 이만한 상속 재산은 없었다. 리슐리외 추기경(순자산 1,600만 리브르)과 샤를 드 곤자가(1637년 550만 리브르)가 최고액이었다. 자산 조사를 피하려 마자랭은 전 재산을 왕에게 유증했다. 왕은 사흘을 망설이다 수용했고, 다시 상속인들에게 넘겨주는 당시의 전형적인 수법으로 사법적 추적을 피했다. 그의 탐욕은 사제 서품도 받지 않은 자신이 새로 정복한 부유한 지역의 대주교가 되려는 욕심으로까지 이어졌으나 교황이 반대해 무산됐다.

유언에 따라 마자랭은 '사국 대학(콜레주 데 카트르 나시옹, 현 프랑스 학술원)' 건립을 지시했다.

가문과의 인연

마자랭 추기경의 막대한 재산과 조카딸들을 고위 귀족과 혼인시켜 왕실 은혜를 얻게 하려는 의지는 하나의 왕조를 형성했다.

올랭프, 마리, 오르탕스, 마리안 만치니 네 자매는 미모와 지성, 자유로운 연애사로 유명했다.

  • 마리 만치니는 젊은 루이 14세의 크고도 플라토닉한 연인이었으나, 왕은 사촌 마리 테레즈 데 오스트리와 정략결혼을 위해 그녀를 포기했다.
  • 오르탕스는 1661년 3월 1일 아르망 샤를 드 라 포르트, 마엔느 공작 겸 라 믈레레 공작과 결혼했다. 그는 마엔느 역사에 큰 족적을 남겼으며 1654년 5월 마엔느 공국을 매입했다. 이후 잇단 혼인으로 공국은 다른 가문으로 넘어갔고, 최종적으로 모나코의 현 군주 알베르 2세의 조상인 오노레 4세 그리말디의 아내 루이즈 도몽에게 이르렀다.
  • 올랭프 만치니(수아송 백작 부인)는 합스부르크 가문을 섬기며 루이 14세 군대를 수차례 격파한 명장 외젠 왕자의 어머니다.

그들의 오빠 필리프는 몽테스팡 후작 부인의 조카 디안 드 티안주와 결혼했으며, 학술원 회원 루이 쥘 만치니 마자리니의 조부모이자 현 그리말디 가문의 조상이 되었다.

조카딸들과 루이 14세의 염문을 기록한 아브라함 드 비크포르트는 바스티유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마자랭이 안 도트리슈와 비밀리에 결혼했는지는 논란거리이나, 암호로 쓰인 둘의 서신만 봐도 관계의 깊이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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