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작가이자 역사가, 정치가였던 토머스 베이빙턴 매컬레이가 1842년 저서 고대 로마의 노래(The Lays of Ancient Rome)에서 쓴 시의 한 구절입니다.
"조상의 유해와 신들의 신전을 지키며 끔찍한 운명을 맞이하는 것보다, 남자가 죽는 더 좋은 길이 어디 있겠는가?"
이 시는 동족을 위해 목숨을 바쳐 에트루리아의 침략에 맞서 홀로 다리를 지킨 로마 군인, 호라티우스 코클레스(Horatius Cocles)를 기리는 내용입니다. 언제나 그렇듯, 이 이야기에서 역사적 사실과 전설이 어디서부터 갈리는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건국 신화와 역사 사이의 영웅
기적적인 사건, 엄숙한 예언, 군사적 승리(혹은 패배), 초월적 차원의 인물들. 이 모든 것이 결합되어 종종 민족 정체성을 형성하는 건국 신화를 이룹니다. 대개 이런 이야기들은 과장되고 시간이 지나며 왜곡되어, 엄밀한 역사적 사실보다는 전설적 성격이 강해집니다. 그 기능은 충실히 수행하지만, 역사가들을 '사실'과 '상상' 사이로 갈라놓는 곤란한 처지에 빠뜨리기도 합니다. 고대 로마는 이의 전형이었고, 호라티우스 코클레스의 일화는 진실과 전설 사이 어딘가에 있는 영웅담의 좋은 예시입니다.
명문 호라티우스 가문의 후예
푸블리우스 호라티우스 코클레스는 겐스 호라티아(Gens Horatia), 즉 호라티우스 씨족 출신이었습니다. 자크루이 다비드의 유명한 그림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로 우리에게도 친숙한 가문입니다. 전승에 따르면 그 기원은 로마의 3대 왕 툴루스 호스틸리우스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라틴계 뿌리를 가졌으나 언제 로마에 정착했는지는 불분명합니다.
티투스 리비우스가 전하는 오래된 전설에 의하면, 로마가 이웃 도시 알바 롱가와 대립할 때 세 형제 전사끼리의 결투(호라티우스 3형제 대 쿠리아티우스 3형제)가 벌어졌고, 호라티우스 가문이 승리하여 로마에 남게 되었으며 패한 쪽은 알바 롱가로 갔다고 합니다.
이름 '코클레스'의 유래
'호라티우스'라는 이름은 영웅 '호라투스(Horatus)'에서 유래했으며, 그에게 참나무가 바쳐졌다고 합니다. 프라에노멘(개인명)으로는 푸블리우스, 마르쿠스, 루키우스, 가이우스 네 가지를 주로 썼는데, 로마인들은 친족 사이에서만 이름을 썼고 대외적으로는 노멘(씨족명)이나 코그노멘(분파명)으로 불렸기 때문에 이름의 폭이 매우 좁았습니다. 호라티우스 가문에도 바르부스(Barbatus)와 풀빌루스(Pulvillus) 같은 분파가 있었는데, 왜 푸블리우스 호라티우스만 '코클레스(Cocles)'라고 불렸는지는 의문입니다. 이는 가문 대대로 물려받은 코그노멘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얻은 아그노멘(별명)으로 보입니다.

플루타르코스는 '코클레스'가 그리스어 '키클롭스(κύκλωψ, 키클롭스)', 즉 '외눈박이'에서 왔다고 봅니다. 전투 중 한 눈을 잃었거나, 외모가 마치 외눈박이 같았음을 시사합니다. 어원이 확실치는 않고 실제로 그가 외눈박이였는지도 알 수 없지만, 이 별명이 그 자신만 썼고 가문이나 씨족 내 누구도 쓰지 않았다는 점에서 개인적 아그노멘임은 분명해 보입니다.
흥미롭게도, 코클레스라는 별명이 그의 시대가 아닌 훨씬 뒤에 붙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의 무용담을 기록한 로마 역사가들(폴리비오스, 할리카르나소스의 디오니시우스 등)이 기원전 3~1세기 인물로, 사건으로부터 약 300년 뒤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플리니우스 대 시대에, 시간이 흘러 훼손된 불카누스 신상을 호라티우스 상으로 오인하면서 '외눈박이'라는 별명이 생겼다는 설도 있습니다. 불카누스는 추하고 기형적이며 외눈박이로 묘사되었기 때문입니다.

기원전 509년, 에트루리아 왕 라르스 포르세나의 침공
에트루리아 도시 클루시움의 왕 라르스 포르세나(Lars Porsena)는 축출된 로마 왕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오만한 자)를 받아들였습니다. 그 역시 에트루리아계였습니다. 포르세나는 군대를 일으켜 로마로 진군해 타르퀴니우스를 복위시키려 했습니다. 위기가 컸던 만큼 이 전쟁은 여러 영웅 전설을 낳았습니다.
가이우스 무키우스 스카에볼라의 시위
원로원이 보낸 청년 가이우스 무키우스가 적진에 잠입해 포르세나를 암살하려다 발각되었습니다. 심문 중 그는 "나는 300명의 암살자 중 첫 번째에 불과하다"고 선언하고, 오른손을 화로 불 속에 넣어 자신의 의지를 증명했습니다. 이 전형적인 로마적 비르투스(virtus, 남성다움·용기)의 과시는 그에게 '스카에볼라(왼손잡이)'라는 아그노멘과 자유를 안겨주었습니다.
클로엘리아의 탈출
전쟁 후, 강화 조약의 인질로 잡혀 있던 젊은 여성 클로엘리아가 여러 처녀를 데리고 탈출했습니다. 포르세나의 요구로 돌려보내졌지만, 그는 그녀의 용기에 감탄해 인질 절반을 풀어주라 허락했습니다. 클로엘리아는 아이들을 골라 석방시켰고, 비아 사크라에 기마상이라는 영예(원래 기사 계급 남성에게만 허용되던)를 얻었습니다.
이 이야기들이 어디까지 사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앞서 말했듯 로마인의 민족 정체성을 지탱하는 뼈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보다 더 유명한 세 번째 영웅담이 있으니, 바로 호라티우스 코클레스의 이야기입니다. 그의 활약은 휴전 조약 체결 이전에 벌어졌으며, 사실상 그 조약을 가능하게 만든 결정적 행동이었습니다.
수블리키우스 다리에서의 최후 방어선
기원전 508년, 에트루리아군은 테베레 강 서안에 집결해 야니쿨룸 언덕을 점령했습니다. 당시 성벽 밖에 있던 이 언덕엔 작은 보루가 있었고, 수블리키우스 다리와 함께 로마의 제1 방어선을 이뤘습니다. 이 거점이 무너지자, 로마군은 네비아 문 앞 평원에 진을 치고 강을 등진 채 에트루리아군을 막으려 했습니다.
양 집정관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볼루수와 티투스 루크레티우스 트리피티누스가 지휘했지만, 포르세나는 주력 부대로 이들을 압박했습니다. 수적 우세를 앞세운 공격에 두 집정관이 부상당하자 로마군은 공포에 질려 진형을 무너뜨리고 수블리키우스 다리를 향해 도망쳤고, 적군이 뒤를 쫓았습니다.

티베르 섬 바로 아래, 카피톨리노·팔라티노·아벤티노 언덕이 만나는 지점에 놓인 이 다리는, 반대편에 세르비우스 툴리우스가 강화한 성벽이 버티고 있어 도시로 들어가는 마지막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전통적으로 기원전 7세기 안쿠스 마르키우스 왕이 나무로 처음 놓은 다리라 전해지며, 이름 자체가 물속을 받치는 나무 기둥(수블리케스)을 뜻합니다. 이곳을 건너는 것이 곧 시내 진입을 의미했기에,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지켜야 했습니다.
세 명의 수호자, 그리고 홀로 남은 한 사람이때 등장한 인물이 호라티우스 코클레스입니다. 테베레 강 우안을 감시하던 하급 장교였던 그는, 베테랑 둘—스푸리우스 라르키우스와 티투스 헤르미니우스 아퀼리누스—을 설득해 다리 입구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다리가 매우 좁았기에, 클루시움군(포르세나), 망명 왕당파(타르퀴니우스), 가빌리움군(사위 옥타비우스 마밀리우스)으로 구성된 연합군을 세 명이서 막아보려 한 것입니다. 다수 로마군이 다리를 건너는 동안, 한편에선 다리 기둥을 부수기 시작했습니다. 그 작업을 엄호하는 것이 세 사람의 임무였습니다.
할리카르나소스의 디오니시우스에 따르면, 라르키우스와 헤르미니우스가 중상을 입고 물러서며 코클레스에게 함께 물러나자고 외쳤으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쓰러진 시신들을 엄폐물 삼아 홀로 싸웠습니다. 엉덩이에 창을 맞는 등 여러 상처를 입으면서도, 다리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버텼습니다. 그리고 칼과 방패를 든 채 물속으로 뛰어들어 헤엄쳐 반대편 강안으로 돌아왔습니다. 티투스 리비우스는 이때 그가 기도했다고 전합니다.
"테베레 강의 아버지여, 이 무기와 당신의 전사를 당신의 길한 물결 속에 받아주소서."
영예와 의문, 그리고 또 다른 결말
부상으로 평생 절름발이가 되어 군 복무나 공직 진출이 불가능해졌지만, 로마인들은 열광적으로 그를 맞이했습니다. 보상으로 월계관, 코미티움(나중에 포룸의 북서쪽 모퉁이가 될 공개 정치·사법 광장)에 세울 청동상, 하루 동안 소 한 쌍으로 갈 수 있는 만큼의 토지를 주었습니다. 게다가 전쟁 중 식량난이 심했음에도, 모든 시민이 하루치 식량을 그에게 바쳐야 했습니다.
주목할 점은, 이 세 영웅이 로마 인구를 구성했다는 세 고대 부족을 상징한다는 것입니다. 라틴족(호라티우스), 루케레스/에트루리아족(라르키우스, 프라에노멘 '라르스'에서 유래), 티티엔세스/사비니족(헤르미니우스, 가문은 역설적으로 에트루리아 출신). 이러한 상징성과 티투스 리비우스가 "신빙성이 적다"고 평가한 점, 폴리비오스처럼 코클레스가 익사해 죽었다는 버전이 존재하는 점 등은 이 일화의 역사적 정확성에 의문을 던집니다. 죽었다면 두 번 영웅적인 셈입니다. 공동선을 위해 목숨을 바쳤으니까요.
전쟁의 결말 역시 불확실합니다. 리비우스·디오니시우스·플루타르코스는 포르세나가 그들의 용기에 감복해 철군하고 타르퀴니우스를 버렸다고 하지만, 타키투스나 플리니우스 대는 로마가 멸망은 면했으나 일시적 점령을 피하지 못했고(포르세나가 '잃어버린 왕들' 중 하나), 인질 제공(클로엘리아 사례)과 철제 농기구 외 무기 제작 금지를 강요하는 가혹한 조약을 맺었다고 전합니다. 어쨌든 비르투스만은 지켰습니다.
참고 문헌
- 로마 건국사(Ab Urbe Condita) — 티투스 리비우스
- 로마 고대사(Roman Antiquities) — 할리카르나소스의 디오니시우스
- 영웅전(Parallel Lives) — 플루타르코스
- 세계사(로마 공화정기) — 폴리비오스
- SPQR: 고대 로마의 역사 — 메리 비어드
- 로마사 — 세르게이 이바노비치 코발료프
- 고대 로마의 노래(The Lays of Ancient Rome) — 토머스 베이빙턴 매컬레이
- 위키피디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