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자유 프랑스 해병대의 '파샤', 위베르 아미오 당빌

자유 프랑스 해병대의  파샤 , 위베르 아미오 당빌

덩케르크 철수를 엄호하던 소위

1940년 연합군이 덩케르크에서 독일군에 포위되었을 때, 아미오 당빌(Amyot d'Inville) 소위는 대륙과 영국 사이를 오가며 연합군 병력의 철수를 엄호하는 호위 함선 중 하나의 지휘를 맡고 있었습니다. 노르망디 옛 귀족 가문 출신인 이 젊은 장교는 프랑스 해군 '루아얄(Royale)'의 직업 군인이 아니라 예비역이었으며, 상관에게 맞서더라도 자신의 신념을 꺾지 않는 기개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리고 정전 협정이 체결되던 그 순간, 그는 대다수 해군 장교들과 달리 자유 프랑스 진영에 서기를 택했습니다.

바다를 등진 해군, 해병소총대대

1940년 7월 22일, 그는 육상 전투를 위해 창설된 해병소총대대(Fusiliers Marins)에 합류했습니다. 드트루아(Détroyat) 소령 휘하에서 한 개 중대의 지휘를 맡은 그는, 비시(Vichy) 정부에 충성을 유지한 동포들과 다카르에서 불행한 교전을 벌인 뒤, 1941년 4월 영국 수송선을 따라 수에즈에 상륙한 자유프랑스 지원병들과 함께하게 됩니다.

이후 해병 소총병들은 제1자유프랑스사단(DFL)에 통합되었고, 뎅츠(Dentz) 장군이 이끄는 비시 프랑스군과 맞서는 시리아 전역에 투입되었습니다. 프랑스인이 프랑스인의 총구 앞에 서야 했던 참혹한 동족상잔의 전장에서 드트루아 소령은 전사했고, 아미오 당빌 역시 1941년 6월 17일 프랑스군의 탄환에 부상을 입었습니다. 상처가 아무는 대로 그는 대대 지휘관으로서 팔레스타인과 이집트를 거쳐 북아프리카 사막으로 행군을 이어갔습니다.

비르 하켐의 영웅적 방어전

'붉은 폼폰(Red Pompons)'이라 불린 이 해군 병사들은 1942년 초 요새화된 비르 하켐(Bir Hakeim) 진지에 배치되어 40밀리 보포스 대공포를 운용했습니다. 아미오 당빌 소령의 부하들은 메서슈미트 전투기와 융커스 폭격기를 상대로 필사적으로 맞섰습니다. 영웅적인 저항의 시간을 보낸 비르 하켐 수비대는 이집트에서 잠시 숨을 고른 뒤 리비아로 복귀해 엘 알라메인 전투에 참가했습니다.

사막 위로 이어진 3000킬로미터의 행군과 전투 끝에 그들은 마침내 튀니스에 도달했고, 부대는 약 200대의 장갑 차량을 보유한 정찰 대대로 재편되었습니다.

'파샤'의 최후

아미오 당빌 소령의 '해병 기병들'이 이끈 이탈리아 전역은 마치 거침없는 질주와도 같았습니다. 그러나 1944년 6월 3일, 그의 지프가 적의 지뢰를 밟으면서 모든 것이 끝나버렸습니다. 군함에서처럼 부하들이 '파샤(Pacha)', 혹은 희롱 섞인 애정 어린 조롱으로 '제독'이라 불렀던 이 지휘관은 즉사했습니다. 로마가 해방되기 바로 전날의 일이었습니다.

크고 야윈 체구에 여우를 연상시키는 날카로운 눈빛, 침착하고 담백한 태도를 지녔던 그는 자유 프랑스 역사상 가장 인기 있는 지휘관 중 한 명으로 오늘날까지 기억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