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나바라의 왕 앙리: 궁정의 인질에서 프랑스 왕관 계승자까지

나바라의 왕 앙리: 궁정의 인질에서 프랑스 왕관 계승자까지

앙리 드 나바라(Henri de Navarre)는 총명하고 관찰력이 뛰어난 인물로, 상황에 놀랍도록 유연하게 적응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그의 판단은 확실하였고, 늘 현실적인 통찰과 '베아르네 농부'다운 소박한 상식은 함정을 피하고 위험을 미리 감지하게 해주었다. 덕분에 그는 종종 불리하게 기운 상황마저 자신에게 유리하게 돌려놓곤 했다.

인내의 시간: 궁정의 인질로 살다

인내심과 강한 의지, 고집스러울 정도의 끈기, 그리고 달성해야 할 목표에 대한 명확한 비전이 나머지를 완성했다. 이는 어머니 잔 다르브레(Jeanne d'Albret)가 일찍이 그에게 행한 개인 교육의 결실로, 그 혜택이 바로 지금 드러나고 있는 것이었다.

거의 4년 동안 앙리는 이러한 역량을 총동원하여 자신을 반기지 않는 궁정 내 극단파를 속여 넘겼다. 그는 궁정에 처음 도착했을 때 자신을 크게 괴롭혔던 분노와 원망을 속으로 억눌렀고,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학살(1572년) 직후 겪었던 고통스러운 체념도 숨겼다. 궁정 귀족들의 조롱과 '왕비 마르고'의 방종한 행실 앞에서 반감을 삼키며, 그는 고향 사람처럼 단순하고 온순한 모습으로 시간을 기다렸다.

1576년, 운명적인 탈출

그리고 그 순간은 1576년 2월, 상리스(Senlis) 숲에서의 사냥 중에 찾아왔다. 사실상 '궁정의 인질'이었던 그는 숲의 틈새를 이용해 탈출에 성공했다. 나바라 국왕은 남쪽으로 말을 몰아 질주했고, 루아르 강을 건너 투르(Tours)를 지나면서 배교 선언을 철회했으며, 칼뱅파의 땅인 푸아투(Poitou)에 도달했다. 도망자는 지지자들의 선두에 섰고, 그의 영향력은 사실상 랑그독(Languedoc)까지 뻗어 나갔다.

전쟁과 협상의 반복

기즈 공작(Duc de Guise)의 주도로 신성동맹(Ligue)이 결성되면서 볼리외 조약의 밝은 성과는 무효화되었다. 1577년 전쟁이 재개되었고, 앙리는 마르망드(Marmande)와 라레올(La Réole)을 점령했다. 이러한 전역 사이사이에는 푸아티에 칙령, 베르제라크 평화, 1579년 블루아 칙령 등 협상의 시기가 이어졌으나 헛된 노력이었다. 양측의 입장이 너무나 첨예하게 대립하여 어떤 합의도 오래 지속될 수 없었다.

1580년, 나바라 국왕은 리무주 자작령과 가론 유역 사이에 위치한 중요한 가톨릭 거점인 카오르(Cahors)를 함락시켰다. 네라크(Nérac)와 플레(Fleix)의 평화조차 두 차례의 전역 사이의 짧은 간격에 불과했다. 1581년 몽토방(Montauban)의 프로테스탄트 회의는 이 베아르네 출신에게 '교회들의 보호자'라는 칭호를 부여했고, 이듬해 생장당글리(Saint-Jean-d'Angély) 회의는 그 권한을 구체적으로 정의했다.

왕관 계승자가 되다

그러나 변화무쌍했던 이 시기의 가장 중요한 사건은 단연 1584년 6월, 앙리 3세의 동생인 앙주 공작(Duc d'Anjou)의 죽음이었다. 왕실 후계자가 없게 되자 나바라 국왕은 즉시 왕관 계승자의 지위로 올라섰다.

이번에는 가톨릭 진영의 반발이 극에 달했다. 기즈 가문의 사상을 충실히 반영하는 신성동맹이 들고 일어났고, 이 감정은 마드리드까지 번졌다. 개혁파 프랑스라는 전망에 위협을 느낀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는 매월 5만 에퀴와 자원병을 제공하며 "분파와 이단을 뿌리뽑겠다"고 약속했다. 이제 앙리 3세의 앞에는 카롤링 왕조의 혈통을 자처하는 강력하고 야심찬 기즈 공작이 버티고 서 있었다. 이것이 바로 '세 앙리의 전쟁(Guerre des trois Henri)'이다.

쿠트라의 승리와 기즈의 몰락

앙리 3세의 총신(mignon)인 조아유스를 쿠트라(Coutras) 전투에서 화려하게 격파하는 성과를 거두었음에도, 나바라 국왕의 고민은 끝나지 않았다. 1588년, 앙리 드 기즈는 '파리의 왕'이라 불릴 만큼 왕좌에 그 어느 때보다 가까이 다가서 있었다. 왕관이 손에 닿을 듯했지만, 과신과 오만에 사로잡힌 그는 완전한 승리를 갈구하며 시간을 끌었다. 이 치명적인 자만이야말로 베아르네 출신 앙리의 대의에 도움이 되었다.

기즈와 동맹파에게 경멸당한 앙리 3세는 마침내 반격에 나섰다. 단검과 '45인의 검'은 기즈 공작의 야망을 잔인하게 끝장냈다. 기즈에 대한 증오 때문에 앙리 3세는 투르에 임시로 설치된 파리 고등법원 의원들의 조언에 따라 나바라 국왕에게 손을 내미는 길을 택했다.

플레시레투르의 역사적 회담

1589년 4월 30일, 플레시레투르(Plessis-lès-Tours) 근처에서 13년 만에 처음으로 재위 중인 국왕과 한때 '꼬마 앙리(Henriquet)'라고 불리던 사나이가 마주했다. 베아르네 군대는 셰르(Cher) 강 건너편에 진을 치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나바라 국왕이 자신의 대의를 관철하기 위해 무력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참석자들의 환호만으로도 화해의 시간이 왔음을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국왕 만세!"라고 외치는 이들에게 "나바라 국왕 만세!", 그리고 의미심장하게도 "두 국왕 만세!"라는 외침들이 화답했다.

그러나 앙리 3세에게 이 소원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수도사 클레망(Clément)의 단검이 곧 그의 생명을 끝냈다. 하지만 국왕은 플레시레투르에서 재결합된 왕국의 통합을 봉인할 만큼 충분한 명석함과 상식을 지니고 있었다. 앙리 드 나바라는 지정된 후계자였다. 신성동맹은 이미 정신적으로 패배한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이 결과를 전장에서 확인하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