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왕정의 정점
'태양왕'이라 불린 루이 14세는 왕권을 강화하여 신권(神權)에 근거한 절대군주제를 확립했다. 1655년 4월 13일, 그는 비어 있는 국고를 충당하기 위한 17개의 칙령을 반포했다. 전설에 따르면 이때 저항하는 고위 법관들에게 "국가란 곧 나다!"라는 유명하지만 논란이 된 말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실제로 그는 이 말을 한 적이 없다. 오히려 1715년 임종 직전 "나는 떠나지만 국가는 영원히 남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정반대의 입장을 밝혔다. 루이 14세는 스스로를 국가의 단순한 '첫 번째 종복'으로 규정하며, 자신과 국가를 구분하는 견해를 보였던 것이다.
푸케의 실각
1661년 3월 9일 마자랭이 사망하자 루이 14세의 첫 번째 결정은 수상직을 폐지하고 정부를 직접 장악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왕의 측근들은 그가 국가 지도자로서의 그릇을 갖추었는지 확신하지 못했다. 루이는 자신의 능력과 권위를 입증해야만 했다. 6개월 후인 1661년 9월 5일, 자신의 23번째 생일을 맞은 날, 왕은 장바티스트 콜베르의 조언에 따라 다르타냥에게 니콜라 푸케를 체포하게 했고, 재무감독관직 또한 폐지했다.
물론 푸케가 일부 횡령을 저지른 것은 사실이지만, 그 규모가 마자랭이나 콜베르보다 더 컸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8년간의 재직 기간 동안 상당히 유능하게 일했으며, 덕분에 프랑스 재정은 30년 전쟁과 1648년 프롱드의 난으로 인한 지출에서 어느 정도 회복될 수 있었다. 그러나 왕에게는 나라를 누가 통치하는지 보여주고, 지나치게 야심차다고 판단한 인물을 제거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3년간의 조작된 재판 끝에 푸케는 1665년 콜베르로 교체되었고, 태양왕의 친정(親政)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행정 군주제로의 전환
루이 14세 통치 초기는 대대적인 행정 개혁과 특히 세금 부담의 증가로 특징지어진다. 이를 통해 사법 중심의 군주제(왕의 핵심 기능이 재판을 집행하는 것)에서 행정 중심의 군주제(왕이 행정부의 수반이 되는 체제)로의 전환이 이루어졌다. 콜베르가 이끄는 재정 부문이 사법을 제치고 최고평의회의 최우선 관심사로 부상했다. 원래 사법을 담당해야 할 대법관직은 루이 14세 시대에 프랑수아 미셸 르 텔리에가 맡았는데, 그조차 사법 업무를 내려놓고 주로 전쟁 업무에 전념했다. 그는 1667년 사실상의 민법전인 '루이 법전', 1670년 형법전, 삼림법전, 1669년 해군 계급에 관한 칙령, 1673년 상업 조례 등 수많은 법령을 제정했다.
두 파벌의 견제와 균형
시간이 흐르면서 왕의 곁에는 두 개의 파벌이 자리 잡고 경쟁하며 공존하게 되었다. 콜베르 파벌은 경제, 외교, 해군, 문화 관련 업무를 총괄했고, 르 텔리에-루부아 파벌은 국방을 통제했다. 왕은 이처럼 '더 잘 정복하기 위해 분열시켜라'라는 방침을 채택했다. 경쟁하는 두 파벌을 직속에 두면 서로를 견제하게 되어, 어떤 대신도 자신에 대한 쿠데타를 노릴 만큼 권력이 커지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파벌 세력의 변화
1671년까지는 콜베르 파벌이 우세했지만, 네덜란드 전쟁 준비가 시작되면서 대규모 지출을 꺼리던 콜베르의 소극적 태도가 왕의 눈에 흉으로 비치기 시작했다. 더욱이 콜베르(당시 52세)와 왕(33세) 사이의 나이 차이 때문에, 왕은 자연스럽게 자신과 같은 열정—전쟁에 대한 열정—을 공유하는 30세의 루부아에게 가까워졌다. 그 결과 1685년까지 루부아 파벌이 궁정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