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 14세가 태어난 이래 프랑스는 스페인, 그리고 더 넓게는 유럽 전역을 지배하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패권과 끊임없이 전쟁을 벌여왔습니다. 프랑스는 당시 '30년 전쟁'이라 불리던 전쟁의 마지막 3분의 1 기간에 직접 참전했으며, 이 전쟁은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종결되었습니다. 이후 프랑스는 콩데 공이 주도하고 스페인이 주요 후원자였던 내전, 이른바 '프롱드의 난'과 관련된 국내 분쟁을 수습해야 하는 과제 안에 놓였습니다.
전쟁의 왕, 루이 14세
1658년 6월 23일 됭케르크에서, 당시 올리버 크롬웰이 통치하던 잉글랜드와 동맹을 맺은 프랑스군은 모래언덕 전투(뒨 전투)에서 콩데 공과 스페인 연합군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는 당시 스무 살이던 젊은 루이 14세에게 있어 초기의 큰 승리 중 하나였습니다.
루이 14세는 재위 54년 중 무려 32년을 전쟁에 바쳤습니다. 국왕은 국내 행정을 콜베르에게 맡기고, 미셸 르 텔리에와 그의 아들 루부아 후작의 도움을 받아 군제 개혁을 단행했습니다. 급료 체계의 통일, 1670년 앵발리드(국립훈장원) 설립, 징병 제도 개혁 등이 대표적입니다. 이러한 개혁은 탈영을 크게 줄이고 군인들의 생활 수준을 끌어올렸습니다. 아울러 그는 군사 기술자 보방에게 영토 주변에 요새 방어선을 구축하도록 명하여 이른바 '프레 카레' 정책을 실현했습니다. 이렇게 30만 명 규모의 군대를 갖춘 루이 14세는 프랑스의 세계적 위상을 강화하기 위해 왕국을 수많은 전쟁과 전투에 끌어들였습니다.
- 1667~1668년: 권리 상속 전쟁
- 1672~1678년: 네덜란드 전쟁 — 유명한 니메겐 조약으로 종결
- 1688~1697년: 아우크스부르크 동맹 전쟁(9년 전쟁)
- 1701~1713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이러한 전쟁들은 프랑스 영토를 크게 확장시켰습니다. 루이 14세 치세에 프랑스는 오트알자스, 메스, 툴, 베르됭, 루시용, 아르투아, 프랑스령 플랑드르, 캉브레, 프랑슈콩테, 자르, 에노, 바스알자스를 차례로 손에 넣었습니다. 이러한 영토 확장은 유럽에서의 프랑스 패권을 확고히 다졌으며, 제노바 도제처럼 국왕의 위광에 도전하려 한 세력은 그 대가를 빠르게 치러야 했습니다.
그러나 지속적인 전쟁 상태는 국가 재정을 파산 직전까지 몰아넣었고, 이는 백성들뿐 아니라 귀족에게도 무거운 세금(인두세, 십일세) 부과로 이어졌습니다. 심지어 왕실 가족조차 세금 납부 대상이 되었습니다. 루이 14세 치세에 귀족은 궁정에 얽매인 순종적 계층으로 변모했습니다. 반면 국왕은 정치적 권한을 부르주아에게 넘겼는데, 콜베르가 가장 좋은 예입니다. 루이 14세는 경계하는 귀족들에게 정치적 주도권을 거의 부여하지 않았으나, 그의 후계자 루이 15세는 이 정책을 계승하지 않았습니다.
즉위 초 유럽의 또 다른 강대국은 스페인이었지만, 1715년 무렵에는 영국, 특히 잉글랜드가 프랑스에 가장 강력한 경쟁자로 부상하게 되었습니다.
해군 육성
1661년 마자랭이 사망할 당시 프랑스 왕립해군과 그 항구, 조선소는 처참한 상태였습니다. 제대로 운항 가능한 전열함은 겨우 열 척 남짓이었습니다. 같은 시기 잉글랜드 해군은 157척(절반이 30~100문의 대포를 장착한 대형 선박)을 보유하고 있어 프랑스 해군과의 비율이 1대 8에 달했으며, 네덜란드 연합공화국 함대 역시 84척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널리 퍼진 통념과 달리, 루이 14세는 해군에 개인적으로 깊은 관심을 기울였고 콜베르와 함께 프랑스 해군 발전에 직접 기여했습니다. 1662년에는 갤리선 군단(corps des galères)을 창설하여 군사적·상업적 기능을 겸비한 함대를 구축했습니다. 그는 매주 해군 평의회 의장을 맡았고, 자원 동원의 세부 사항까지 세심히 살폈습니다. 매년 무장 규모를 정하고, 해군 장교를 직접 임명했으며, 건조되는 배마다 이름을 직접 붙이기도 했습니다. 국왕은 자신의 해상 군대가 육군만큼 강력하고 두려움의 대상이 되기를 원했지만, 그 목적은 싸우기 위해서라기보다 오히려 싸우지 않아도 되는 억지력을 갖추는 데 있었습니다.
1669년 3월 7일, 그는 해군국무장관 직책을 신설하고 콜베르를 초대 장관으로 공식 임명했습니다. 이후 콜베르와 그의 아들은 전례 없는 인적·재정적·물류적 자원을 동원하여, 사실상 백지 상태에서 프랑스를 해군 강국으로 변모시켰습니다. 콜베르가 설정한 목표는 최소 50문의 대포를 장착한 함선 72척을 포함해 총 120척의 함대를 보유하는 것이었습니다. 1683년 그가 사망할 때 왕립해군은 117척의 함선, 1,200명의 장교, 53,000명의 선원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1661년부터 루이 14세가 서거한 1715년까지 총 381척의 함선과 호위함이 건조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