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법의회의 구성과 내부 갈등

1791년 10월 1일, 보통선거권에 의해 선출된 입법의회가 개원했다. 대중의 큰 관심 없이 치러진 선거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결과는 제헌의회에서 드러난 정치 성향을 상당히 충실히 반영했다. 의석 분포는 다음과 같았다. 푀양파(Feuillants) 264석, 중립파(Impartials) 350석, 자코뱅파(Jacobins, 지롱드파와 몽타냐르파 포함) 136석이었다.
그러나 입법의회가 소집된 시점의 프랑스는 극심한 내부 긴장에 시달리고 있었다. 왕당파와 혁명파는 서로 칼을 갈고 있었고, 바렌 사건 이후 급증한 망명 행렬은 불안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혁명 지지 세력은 이러한 불안감을 과장하며 자신들의 명분을 강화해 나갔다.
루이 16세의 거부권과 의회의 반발
1791년 10월부터 루이 16세는 새로운 내각을 구성해야 했다. 푀양파 성향의 이 내각은 파리 코뮌의 철저한 감시 아래, 사소한 위기에도 민중 봉기를 일으킬 준비가 된 상황 속에서 곧 의회와 마찰을 빚었다.
11월, 입법의회는 여러 법안을 통과시켰다. 가장 유명한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망명자법으로, 망명자들이 1792년 1월 1일까지 귀국하지 않으면 재산을 모두 몰수한다는 내용이었다. 다른 하나는 기권 성직자법으로, 모든 성직자가 8일 이내에 시민 서약을 해야 하며, 이를 거부하면 연금이 취소되고 당국의 감시 대상이 된다는 것이었다.
루이 16세는 즉각 이 두 결정에 거부권을 행사했다. 이 거부와 나르본느(Narbonne) 장관의 해임에 분노한 입법의회는 위협적인 태도로 돌변하여 르사르(Lessart)를 탄핵했고, 결국 국왕은 푀양파 각료들을 물러나게 하고 지롱드파 계열의 내각을 구성할 수밖에 없었다.
전쟁 선포를 둘러싼 대립
새로 구성된 내각은 즉시 유럽의 구체제 군주국들에 대한 전쟁 선포 절차에 착수했다. 이 전쟁이 처음에는 루이 16세 본인이 바랐던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국왕은 프랑스의 패배를 예상하고, 그렇게 되면 혁명이 철회되리라 믿었다. 반면 라파예트(La Fayette)와 그의 정치적 동료들, 대부분 젊은 장교들은 프랑스의 승리를 통해 1792년의 혁명적 급진화를 저지할 수 있으리라 계산하고 있었다.
반면 전쟁 반대 진영에는 로베스피에르(Robespierre) 같은 좌파 인사들이 있었다. 그는 국왕의 숨겨진 의도를 간파하고, 국경 밖의 적보다 '내부의 적'부터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초기 전투는 참담했다. 준비 부족 상태로 전장에 투입된 공화국군은 특히 벨기에 국경에서 뼈아픈 패배를 거듭했다.
세 개의 법령과 내각 교체
국왕의 은밀한 희망을 간파한 입법의회는 1792년 봄, 세 개의 새 법령을 채택했다. 첫째는 기권 성직자들의 추방, 둘째는 국왕 헌법근위대의 해산, 셋째는 파리에 2만 명 규모의 연방군(fédérés) 야영지 설치였다. 당연히도 국왕은 두 번째 조항에만 서명했고, 지롱드파 내각은 사임했으며, 즉시 푀양파 성향의 내각으로 교체되었다.
6월 20일 사건
1792년 6월 20일, 테니스 코트 서약 기념일을 축하하고 의회에 청원서를 전달한다는 명분으로 대규모 민중 시위가 조직되었다. 그 진짜 목적은 국왕을 겁주어 기권 성직자 관련 법령과 연방군 주둔에 대한 거부권을 철회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시위는 곧 폭동으로 번졌고, 격앙된 군중이 튈르리 궁을 습격했다. 그러나 극도로 격렬한 하루의 소요 끝에 루이 16세는 이 인상적인 대치에도 불구하고 끝내 굴복하지 않았다.
왕정에 대한 최후의 타격을 향하여
이 실패에 분노한 파리 코뮌은 곧바로 새로운 공격을 노렸다. 기회는 얼마 지나지 않아 두 가지 중대 사건과 함께 찾아왔다. 첫째는 입법의회가 '조국이 위험하다(la patrie en danger)'를 선포한 1792년 7월 11일의 법령이다. 둘째는 브룬스윅 선언문으로, 왕실에 대한 어떠한 폭력도 즉각 중단하지 않으면 파리를 징벌하겠다는 사실상의 최후통첩이었다. 외국에서 발표되었지만 튈르리 궁의 사주로 작성된 것으로 알려진 이 포고문은 순식간에 화약고에 불을 붙였다.
다시 한번 의회를 넘어선 파리 교외의 민중들은 왕정에 결정타를 가하기 위해 필사적인 의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