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멕시코만을 풍미한 해적, 장 라피트
장 라피트(Jean Lafitte, 1774~1858)는 19세기 초 멕시코만을 누비며 악명을 떨친 해적이다. 그는 프랑스 아키텐 지방 바욘(Bayonne) 출신으로 추정되며, 형이자 동업자인 피에르(Pierre, 1776?~1841?)와 함께 활동했다.
1803년 루이지애나 매입 이후, 라피트는 뉴올리언스 근교의 습지와 만곡 수로 일대에 자신만의 왕국, 이른바 '바라타리아 왕국(Kingdom of Barataria)'을 세웠다. 무려 5,000명이 넘는 부하를 거느렸다고 전해지며, 이들 중 일부는 1815년 뉴올리언스 전투에서 미군 측 병력으로 참전하기도 했다. 또한 노예 무역이 금지된 시기에 밀무역과 노예 거래에 깊숙이 관여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어린 시절과 프랑스를 떠나다
라피트는 1774년 11월 22일, 프랑스 아키텐 지방 그라디냥(Gradignan) 근처 생쉬랭(Saint Seurin)에서 태어났다. 개성 넘치고 기품 있는 인물로 알려진 그는 대략 1793~1794년, 즉 '공포정치(Terror)' 시기에 경제적인 이유로 프랑스를 떠났다. 이후 카리브해에서 형 피에르를 만나 함께 큰 부를 쌓으려 했으며, 실질적으로는 1809년부터 형제가 합류해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밀수와 해적 행위에 가담해 '바라타리아 왕국'의 이름으로 활동하며 어떤 국가의 주권도 인정하지 않았다. 포르투갈계 유대인 혈통이라는 설이 있던 그는 이를 근거로 스스로를 스페인과 종교재판소(Inquisition)의 적이라 칭하기도 했다.
'바라타리아 왕국'의 건설
1806년(형 피에르는 약 1804년경 도착, 장은 1809년 합류), 라피트 형제는 나폴레옹이 1803년 11월 미국에 매각한 루이지애나 근교의 바라타리아에 정착했다. 당시 이 지역은 독립된 주로서의 지위를 갖지 못했고, 라피트 형제는 이러한 제도적·법적 공백을 교묘히 이용해 지하 경제를 구축했다.
바라타리아는 접근이 어려운 여러 섬들로 이루어진 지역으로, 해적 기지와 함대, 그리고 스페인 사람들에게서 빼앗은 노예 등 '금지품'들을 숨기기에 더없이 적합한 곳이었다.
루이지애나의 인기인
장 라피트는 루이지애나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여인 카트린 빌라르(Catherine Villard)의 연인이었다. 그녀의 오빠 피에르 드 마리 빌라르와 여동생 역시 혼혈 출신이었다. 한편 라피트는 사회 전반이 원하는 물품들을 판매하던 덕분에 루이지애나에서 상당한 인기를 누렸다.
1812년 전쟁과 뉴올리언스 전투의 영웅
1812년, 영국은 독립전쟁 30년 만에 젊은 미국에 다시 전쟁을 선포했다. 미군은 아직 약한 상태였고, 라피트는 500명의 부하와 스페인에게서 빼앗은 다수의 대포를 보유하고 있었기에 양측 모두 그의 손을 잡으려 앞다퉜다. 결국 라피트는 영국에 맞서 미국 편을 들기로 한다.
1815년 1월 8일, 뉴올리언스 근교 샬메트(Chalmette) 전투에서 라피트의 대포는 영국군 3,000명을 살상하고 1,000명을 실종시키는 데 일조한 것으로 전해진다. 반면 미군의 사망자는 100명 미만, 라피트의 부하는 단 세 명이었다. 흥미롭게도 이 전투는 영국과 미국이 이미 두 주 전에 유럽에서 강화 조약을 체결했지만, 그 소식이 대서양을 건너 전해지지 않았기에 벌어진 무의미한 전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승리는 장 라피트를 '전쟁 영웅'으로 만들어 주었다.
갤버스턴으로의 이주와 이중 스파이 행보
장 라피트는 백 척의 배와 5,000명의 부하를 지휘할 정도의 세력을 갖춘 인물이었지만, 본질적으로는 밀수업자였다. 그는 미국령 루이지애나를 떠나 1821년까지 무정부 상태에 놓여 있던 스페인령 텍사스의 갤버스턴(Galveston)으로 거처를 옮겨 계속 밀무역을 이어갔다.
그는 멕시코 독립을 지지하는 한편, 동시에 스페인 측에서도 일하는 이중 게임을 벌였다. 이 덕분에 그는 1820년까지 사업을 지속할 수 있었고, 이후 갤버스턴을 떠나면서 행적이 묘연해진다. 다만 1817년 처음으로 프랑스를 잠시 방문한 적이 있으며, 최종적으로는 1824년 귀국했다.
말년의 삶
형 피에르는 1821년 유카탄(Yucatán)에서 급성 열병으로 사망했다. 1823년, 장 라피트는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한 신생 콜롬비아 공화국의 사략선(corsair)이 되었다. 1824년 한 차례의 공격 중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1858년까지 살아 있었다.
1809년 형을 따라 아메리카로 떠나기 전, 그는 마들렌 엘리자베트 로잘리 루(Madeleine Elizabeth Rosalie Roux, 1789년 2월 10일~1859년 9월 24일)와 결혼해 세 자녀를 두었다. 1803년생 장(Jean), 1807년생 장 에두아르(Jean Edouard), 1809년생 데지레(Désirée)가 그들이다. 이후 1817년 처음 프랑스로 돌아와 셋째 아들 콩스탱 조제프 에두아르(Constant Joseph Edouard, 1817년생)를 얻었고, 다시 아메리카로 건너간 뒤 1824년 영구 귀국하여 1824년에서 1830년 사이에 네 자녀를 더 두었다. 그중 1824년생 조제프 알렉시(Joseph Alexis)는 현대 후손들의 증조부가 된다.
1809년 이전에는 모리셔스와 인도에서 항해하며 거주하며 노예 무역에 종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839년에는 루이지애나로 돌아가 과거 '버커니어'로 활동하던 곳들을 순회하는 회고의 여정을 떠나기도 했다. 1852년에는 무려 50페이지에 달하는 유언장을 작성했다.
1858년 3월 14일, 그는 프랑스 아키텐 그라디냥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곳에 성을 하나 구입해 살았는데, 현재는 파괴된 상태다. 참고로 1824년과 1826년에 사망했다는 소문은 미국과 쿠바의 스페인 당국—감옥에서 탈출한 곳—에 쫓기고 있던 그가 스스로 퍼뜨린 허위 정보였다.
사라진 보물의 전설
라피트 형제는 아메리카 체류 기간 동안 어마어마한 재산을 축적했다. 그러나 몰락한 후 미국 측이 그의 권리와 재산을 몰수하겠다고 위협하자, 그는 값나가지 않는다고 여겨진 만곡 수로 깊은 곳에 전리품을 묻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오늘날에도 일부 사람들은 라피트의 '보물'을 찾아 나서고 있다.
논란이 된 '라피트 일기'
'장 라피트 일기(Jean Laffite's Journal)'로 알려진 논란의 필사본에는, 1820년대(1826년이라는 설도 있다) 사망 발표 이후 그가 실제로는 미국 여러 주에서 살며 가족을 이루고 이 일기를 집필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유언에 따라 일기의 출판은 100년간 미뤄졌고, 1950년대에야 프랑스어에서 번역되어 세상에 공개되었다. 원본 필사본은 텍사스 주지사 프라이스 다니엘(Price Daniel)이 구입했으며, 현재 텍사스 리버티에 위치한 샘 휴스턴 지역 도서관·기록 보관소(Sam Houston Regional Library and Archives)에 전시되어 있다.
카를 마르크스와 나폴레옹을 얽은 소문들
라피트가 유럽으로 돌아가 카를 마르크스를 만나 그의 선언문 출판 자금을 댔다는 전설도 있다. 심지어 배 열 척과 부하 500명을 이끌고 나폴레옹을 세인트헬레나에서 탈출시키려는 계획을 세웠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당시 영국 수비대는 10여 명에 불과했기에 어쩌면 그리 어렵지 않은 임무였을 수도 있으나, 영국 측에 계획이 새어 들리자 라피트는 실행을 포기했다고 한다. 이런저런 일화들은 해적들 사이에 흐르던 동료애의 정신을 잘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