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브라운슈바이크의 '검은 공작' 프리드리히 빌헬름

브라운슈바이크의 '검은 공작' 프리드리히 빌헬름

프리드리히 빌헬름(Friedrich Wilhelm, 1771년 ~ 1815년 6월 16일)은 '검은 공작(Schwarzer Herzog)'이라는 별명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로,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이자 브룐스빅 선언문(Brunswick Manifesto)의 작성자인 샤를 기욤 페르디낭 공작의 아들이자 후계자였다. 프랑스에서는 외엘스(Oels) 공작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는 중세 시대부터 오늘날 니더작센 지역을 다스려 온 구엘프 가문(Welfen)의 일원이었다. 1806년 당시 그는 볼펜뷔텔에 속한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국의 왕위 계승자였다. 그의 아버지는 유럽 전체에서 가장 명망 높은 장군이었지만, 안타깝게도 발미 전투와 예나 전투라는 두 차례의 중요한 전투에서 패배한 아픔을 안고 있었다.

나폴레옹에 대한 저항과 '검은 군단'

예나 전투의 승리 이후 나폴레옹은 이 공국을 자신이 세울 베스트팔렌 왕국의 단순한 한 주(데파르트망)로 격하시키기로 결심했다. 1806년 틸지트 조약으로 상속받은 공국을 잃게 되면서, 그는 독일에 대한 나폴레옹의 지배에 맞서는 가장 강경한 반대파 중 한 사람이 되었다.

제복의 색깔에서 이름을 따온 '검은 군단'이라 불리는 사병 부대를 이끌고 그는 1809년 반항적인 오스트리아 측에 가담해 전쟁에 참여했다. 이 부대는 보병 연대 하나, 후사르 기병 중대 하나, 포병 포대 하나로 구성되어 있었다. 공작은 미래의 평화 회의에서 발언권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전장에 직접 나서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적진을 뚫고 영국으로

같은 해 바그람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가 패배하자, 그는 적군의 포위를 무릅쓰고 보헤미아와 독일 북서부를 거쳐 영국으로 향하기로 결심했다. 할버슈타트를 점령한 뒤, 브라운슈바이크 근처 외르펠(Oelper)에서 그를 저지하려던 웨스트팔렌군과 교전했다. 수적으로 열세였음에도 그는 프랑스 장군 르우벨(Réubell)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그는 올덴부르크 인근 엘스플레트(Elsfleth) 항구에서 미국 선박을 타고 부대와 함께 영국으로 항해했다.

그와중에 그는 여러 차례 몰래 베스트팔렌에 편입된 자신의 옛 공국을 방문했는데, 이는 그가 백성들 사이에서 계속 높은 인기를 누리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스페인 전역과 최후

영국군에 편입된 그의 부대는 웰링턴 공작 휘하에서 스페인 전역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1813년 그는 브라운슈바이크로 돌아와 새로운 병력을 모집했다. 그러나 1815년 워털루 근교에서 벌어진 카트르브라(Quatre-Bras) 전투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앞서 말했듯이 그는 오늘날까지도 지역 주민들의 깊은 애정을 받는 인물이다. 실제로 현재까지도 그의 이름을 딴 현지 맥주 '슈바르처 헤르초크(Schwarzer Herzog)'가 판매되고 있다.

가족

그는 아내 마리 폰 바덴(Marie von Baden)과의 사이에서 두 아들을 남겼다.

  1. 카를(브라운슈바이크 공작 카를 2세)
  2. 빌헬름(브라운슈바이크 공작 빌헬름)

그를 기리는 기념물

브라운슈바이크의  검은 공작  프리드리히 빌헬름 '검은 공작' 동상 — 1874년 11월 10일에 건립된 기념물로, 조각가 게오르크 페르디난트 하발트(Georg Ferdinand Howaldt)의 작품이다. 2007년 5월부터 재건된 브라운슈바이크 공궁 앞에 다시 세워졌다.

브라운슈바이크의  검은 공작  프리드리히 빌헬름 외르펠(브라운슈바이크 인근)의 기념비 — 앞서 언급한 전투를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다.

브라운슈바이크의  검은 공작  프리드리히 빌헬름 브라운슈바이크 생피에르 문(Porte St. Pierre)의 기념비 — 1809년 원정 당시 공작이 야영했던 곳이다.

브라운슈바이크의  검은 공작  프리드리히 빌헬름 부르크도르프(니더작센)의 기념비 — 같은 원정 당시 공작이 야영했던 곳이다.

브라운슈바이크의  검은 공작  프리드리히 빌헬름 지케(니더작센)의 기념비 — 역시 공작이 야영했던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