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크립스 계획의 주요 내용
크립스 계획(Cripps Plan)은 인도가 독립한 이후에도 인도 번왕국이 인도 연방에 가입하지 않고 영국 왕실의 동맹국으로 남기를 원할 경우, 1818년에 체결된 조약에 따라 제국군(Imperial Troops)을 해당 번왕국에 주둔시켜 이들을 보호하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또한 계획에는 이런 조항도 담겨 있었다. 만약 한 토번이 제헌의회에 참여했지만 헌법 제정 후 인도 연방에 가입하지 않기로 한다면, 그 토번은 기존의 지위를 회복하게 되며, 대신 철도·우편 등 공동체 전체에 중요한 사안에 관해서는 새 연방과 협의를 거쳐야 했다. 크립스는 '영국 정부는 모든 번왕국이 인도 연방에 참여하기를 바라지만, 조약상 의무를 깨뜨리면서까지 강제로 가입을 요구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크립스는 번왕국들에게 작은 국가들이 먼저 자체적인 그룹을 결성하거나 연방 관계를 수립하여, 협력에 기반한 그룹의 정신을 더 큰 단위로 확장해 나가는 첫걸음을 내딛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한 왕이 '새로운 상황에서 왕들은 영령 인도의 정당들과 접촉해야 하는가?'라고 묻자, 크립스는 토번 통치자들이 영령 인도의 지도자들과 접촉하여 미래의 헌법적 변화 과정에서 안정감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답했다.
4월 2일, 크립스는 그를 찾아온 세 명의 왕에게 날카롭게 경고했다. '여러분은 국민회의나 간디와 함께 자신의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우리는 이제 짐을 싸 인도를 떠날 예정이니까요.'
계획의 쟁점과 구조적 문제
이 결의안을 통해 영국 정부는 처음으로 인도의 독립 요구를 공식적으로 받아들였고, 인도에 자치령 지위를 부여하겠다고 약속했다. 영국 연방(Commonwealth)에 잔류할지 여부는 인도의 자유 의사에 맡겨졌다. 그러나 계획에서 가장 큰 논란이 된 부분은 인도의 어느 주든 자신만의 헌법을 제정해 독립할 수 있다는 조항이었다. 이는 파키스탄 요구를 의식한 조치였다. 아울러 크립스 미션은 자치령 독립 시기에 대해 아무런 기간도 명시하지 않았으며, 그 윤곽은 모호하고 불확실했다.
무슬림 연맹은 크립스 미션을 통해 파키스탄 건국 요구를 한 걸음 더 앞당길 수 있었다. 번왕국과 무슬림 연맹의 마음을 사기 위해, 해당 토번과 주들에는 인도 연방에 자발적으로 가입할지 여부를 스스로 정할 자유가 주어졌고, 무슬림 다수 주들은 인도 연방에서 분리되어 남을 권리를 갖게 되었다. 반면 번왕국 내부에서는 여론을 묻는 일에 아무런 비중도 두지 않았다. 토번 군주들에게는 자신들의 국가 대표를 직접 임명할 권리가 주어졌는데, 이렇게 되면 입헌회의 의원의 4분의 1이 비민주적 방식으로 선출되어, 보수 성향의 이들이 진보적 개혁에 반대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었다.
영국령 주들에게 연방 가입 여부의 선택권을 줌으로써 정부는 공동체주의 세력을 오히려 부추겼다. 무슬림 연맹은 파키스탄 건국 요구에 확고부동했지만, 펀잽의 시크교도들은 이에 강력히 반대했다. 무슬림 연맹이 요구한 파키스탄에는 펀잽 전역이 포함되어 있었으나, 펀잽의 시크교도들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인도 밖의 다른 나라로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 크립스 미션은 소수집단의 이익과 권리 보호를 언급했지만, 그 구체적인 방안에 대한 명확한 설명은 제시하지 않았다.
달리트(Dalit)와 후진 계층 역시 크립스 미션 보고서에 불만을 품었다. 그들은 크립스 계획에 자신들의 이익을 보호할 장치가 없다고 지적했다. 또한 크립스 미션은 인도 방위의 책임을 영국 정부가 아니라 인도인의 손에 맡기도록 규정했는데, 이는 인도 국민회의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이었다. 결국 모든 정파가 크립스 제안에 실망했고, 국민회의·힌두 마하사바·무슬림 연맹은 이 제안의 수용을 거부했다.
크립스 제안에서 영국령 주들과 번왕국에는 자신들만의 별도 연방을 결성하거나 연방에서 분리되어 남을 자유가 주어졌지만, 이를 허용한다면 인도에 발칸식 소국 분열 상황이 초래될 우려가 있었다. 온 나라가 이 제안에 현실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느꼈는데, 그 이유는 국내 모든 번왕국의 영토가 영령 인도의 영토와 경계를 맞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연합이 대체 어떻게 기능할 수 있겠는가?
미션의 결렬과 여파
4월 11일, 국민회의와 무슬림 연맹은 크립스 제안을 거부했다. 크립스는 1942년 4월 22일 런던으로 출발했다. 그의 미션이 실패로 끝나자 왕들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특히 왕들의 이중 행보에 대해 국민회의는 크게 실망했고, 왕들을 비난하는 성명을 잇달아 발표했다. 네루는 왕들을 무뢰배, 교활한 자, 바보라고 부른 사람들에게 박수를 보냈다.
크립스 위원단은 실패의 쓴맛을 안고 귀국했지만, 사실 이 실패야말로 영국 정부에게는 최대의 외교적 성공이었다. 처칠은 계획에 대한 수정이나 보증에 전혀 관심이 없었기에 크립스에게 따뜻하게 축하를 보냈다. 처칠은 애초에 인도에 독립을 주는 것을 전혀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미션이 실패하자 윈스턴 처칠은 연합국 측에 이렇게 알렸다. '국민회의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유일한 길은 하리잔과 소수집단을 다수파 힌두의 자비에 맡기는 것밖에 없었을 것이다.' 처칠은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를 설득하여, 인도 지도자들이 서로 합의된 상태가 아니라고 믿게 만들었다.
크립스 미션의 실패 이후, 영국 정부가 크립스를 배신했다는 의심이 일었다. 듀케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렇다. '교활한 크립스는 오직 기만과 속임수, 배신과 양면책략으로만 일을 처리했고, 조금의 후회의 빛도 없었다!'
웨이블 경은 1943년 7월 27일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처칠 총리는 인도와 인도에 관련된 모든 것을 증오한다. … 저 영국 제국주의의 숭배자는 인도를 독립시킨다는 생각만 해도 미쳐버릴 것이다.'
간디는 크립스 계획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크립스 계획은 은행이 곧 도산할 예정인 기일 후급 어음에 불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