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요아킴 무라트: 여관 주인의 아들에서 나폴리 왕이 된 기병 장군

요아킴 무라트(1767~1815), 왕자

1767년 3월 2일 프랑스 로트주의 라바스티드튀니에르(오늘날 라바스티드뮈라)에서 태어나, 1815년 10월 13일 나폴리 왕국의 피초에서 총살형으로 생을 마감한 인물이다.

요아킴 무라트: 여관 주인의 아들에서 나폴리 왕이 된 기병 장군
무라트, 요아킴, 왕자

신학생에서 기병으로

여관 주인의 아들로 태어난 무라트는 카오르에서 신학생으로 수학하며 성직자의 길을 걷고 있었다. 그러나 동료와의 말다툼이 빚어진 사건으로 퇴학당하면서 종교적 삶은 자연히 끝을 맺었다. 이후 1787년 2월, 그는 아르덴 경기병대(Chasseurs des Ardennes)에 기병으로 입대했고, 곧이어 닥친 프랑스 혁명과 전쟁은 그에게 폭발적인 출세의 발판을 마련해 주었다.

혁명기의 눈부신 승진

1792년 5월 하사(maréchal des logis)가 된 그는 불과 몇 달 만인 같은 해 10월 중순에 이미 중위로 진급했다. 이 시기 그는 극단적인 혁명적 신념을 드러내며 존경받던 동료마저 고발했고, 우상으로 섬기던 마라가 암살되자 자신의 이름조차 '마라'로 바꾸려 할 정도의 열성을 보였다. 로베스피에르 실각 후 들이닥친 반동 분위기 속에서 처벌 위기에 몰렸으나 카바냐크의 보호 덕분에 위기를 넘겼고, 1795년 방데미에르 13일의 사건이 그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사블롱 평원에서 대포 4문을 뇌이를 거쳐 튈르리 궁까지 안전히 운반하는 데 성공한 공로로, 보나파르트는 그를 여단장으로 임명했다.

요아킴 무라트: 여관 주인의 아들에서 나폴리 왕이 된 기병 장군
무라트의 문장

보나파르트의 최측근으로

이후 무라트는 코르시카인 보나파르트의 수석 부관이 되며 새로운 우상을 얻었고, 그의 후광 아래 흔들리던 경력이 다시 순탄해졌다. 무모할 정도의 용맹함은 이탈리아 원정과 이집트 원정 어디서든 두드러졌다. 1799년 7월 25일에는 아부키르 전장에서 사단장으로 임명되었고, 보나파르트와 함께 귀국선에 올라 브뤼메르 18일 쿠데타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집정관 근위대 지휘관에 임명된 뒤인 1800년 1월 20일, 제1집정의 누이동생 카롤린과 결혼하면서 보나파르트 가문의 일원으로 들어섰다.

원수의 칭호와 나폴리 왕위

마렝고 전투에서 보여준 용맹으로 명예 검을 수여받았으며, 제정이 선포되자 원수, 대제독, 왕자 등 화려한 칭호가 잇달아 그에게 안겼다. 1805년 독일 전역에서 빛나는 활약을 펼친 그는 베르크와 클레베 대공에 올랐고, 1807년 아일라우 전투에서는 감행한 기병 돌격이 승패를 갈랐다. 에스파냐에서는 왕 조제프 밑에서 왕국 중장으로 재직하다가, 1808년 7월 15일 그의 뒤를 이어 나폴리 왕위에 올랐다. 이때부터 그는 자신만의 정책을 구사했으며, 제국이 흔들릴 때마다 왕좌를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그는 러시아 원정에서 기개 넘치는 활약을 보였지만, 1813년 초 패주하는 대군을 등지고 나폴리로 돌아가 영국 및 오스트리아와 교섭을 시작했다. 그럼에도 매부의 부름에는 응하여 1813년 작센 전역에서 기병대를 지휘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이탈리아 왕국을 양보하지 않자, 1814년 1월 11일 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맺었다. 부르봉 왕가가 나폴리 왕위 반환을 강요하자 백일천하 동안 다시 나폴레옹에게 합류했으나, 1815년 5월 2일 톨렌티노 전투에서 패배했고, 칼라브리아 해안에 상륙한 직후 총살형으로 최후를 맞았다.

황제가 남긴 평가

나폴레옹은 무라트의 용기를 높이 평가하면서도, 그를 '지모가 부족한 인물'이자 '극심한 동요와 고양에 시달리는 사람'이라고 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