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신왕의 마지막 도박, 다시 나폴레옹으로
1815년 3월 15일, 나폴리 왕국의 국왕이자 프랑스 원수였던 조아심 뮈라(Joachim Murat)는 다시 진영을 바꾸기로 결정한다. 엘바 섬을 탈출해 귀환한 나폴레옹에게 재차 충성을 맹세하고, 얼마 전까지 동맹이었던 오스트리아를 적으로 돌린 것이다.
뮈라는 본래 나폴레옹이 남부 이탈리아의 나폴리 왕좌에 앉혀준 인물이었다. 그러나 1813년, 그는 나폴레옹을 배신하고 그의 숙적인 오스트리아와 손을 잡는다. 문제는 1814년 나폴레옹의 퇴위 이후 더욱 심각해졌다. 배신 행위에도 불구하고 연합군은 뮈라를 왕좌에 계속 앉혀둘 생각이 없었다. 지위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다시 한번 판을 뒤집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포 강까지 밀고 올라간 북진
약 5만 명의 병력을 모은 뮈라는 즉시 북진을 개시했다. 이탈리아 반도의 상당 지역을 장악하며 포 강에 도달했고, 페라라를 포위하며 오스트리아에 맞선 이탈리아인들의 봉기를 촉발하고자 했다. 오스트리아군은 약 3만 5천 명을 점차 동원해 맞섰다.
그러나 뮈라는 이탈리아 민중의 호응을 얻는 데 실패했고, 4월 8일부터 9일까지 포 강 도하를 시도하던 오키오벨로(Occhiobello)에서 참패를 당했다. 이후 그는 강력한 후위 부대의 엄호 아래 후퇴에 나섰다.
결정적 대결을 향해
뮈라는 안코나에서 남서쪽으로 약 40km 떨어진 톨렌티노 너머로 물러나, 병력 2만 5천 명과 포 58문을 다시 정비했다. 이 정도 전력이면 병력 1만 3천 명과 포 28문을 지닌 프리드리히 비안키(Friedrich Bianchi) 군단을 쉽게 격파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의 구상은 내선 기동이었다. 먼저 비안키를 격파한 뒤, 남하 중이던 또 다른 오스트리아 군단을 차례로 무찌르는 것이었다.
양측의 전력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비안키 군단: 공병 중대, 정예 척후병 1,000명, 그렌츠 산악 경비대 400명, 후사르 440명, 경포 6문을 갖춘 기마포병으로 구성된 경여단, 9개의 선열 보병 대대, 포 8문씩을 지닌 야전포병 2개 대대, 970명의 강력한 그렌츠 대대, 그리고 기병 726명과 경포 6문의 기마포병을 거느린 토스카나 '여단'.
뮈라 군: 보병 3,330명·기병 1,300명·포 20문으로 이루어진 혼성 근위 사단, 제2보병사단(보병 8,000명, 포 10문), 제3사단(보병 7,900명, 포 10문), 제4사단(보병 1,900명, 기병 500명), 그리고 약 1,800명의 기병사단. 여기에 적 군단을 감시하기 위해 독립적으로 움직이도록 명령된 별도 사단도 있었다.
4월 29일, 오스트리아 후사르가 톨렌티노를 급습해 이탈리아 수비대를 몰아냈다. 뮈라는 마체라타에 진을 치고 공격 준비에 들어갔다. 적의 의도를 간파한 비안키는 병력이 열세임에도 불구하고 톨렌티노 일대에서의 방어를 택했다. 남쪽에서 오던 아군 군단이 도착해 뮈라를 포위할 때까지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그는 병력을 카테르보스 탑, 란치아 옛 성, 마에스타 성당과 생 조제프 성당, 폴렌차 마을 등 일대의 거점에 배치했다.
승리가 눈앞에 보였던 이틀
전투는 1815년 5월 2일 시작되었다. 뮈라의 군대는 맹렬히 공격해 잠시 동안 비안키 본인을 포로로 잡기까지 했지만, 오스트리아 후사르의 역공으로 곧 석방되고 만다. 격렬한 포격전 끝에 뮈라의 병사들은 폴렌차 마을과 란치아 성으로 진격했다. 그곳에서는 놀라운 영웅행과 참혹한 학살의 광경이 벌어졌다. 두 거점은 여러 번 주인이 바뀌었고, 그 안팎에는 시신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그러나 하루가 저물 무렵에는 오스트리아군이 우세를 점했다.
하지만 뮈라에게 항복이란 없었다. 다음 날인 5월 3일, 전투 2일차를 알리는 포성이 다시 울려 퍼졌다. 이번에는 이탈리아군이 란치아 성과 인근 칸타갈로 고지를 함락하며 오스트리아군 좌익을 압박하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승리가 확실해 보이던 바로 그 순간, 비극적인 실수가 일어난다.
다가오는 오스트리아 기병의 공격이 두려워진 이탈리아군은 보병 공격을 멈추고 방진(方陣)을 형성했다. 그러나 이는 오스트리아 보병에게 재정비할 시간을 준 것은 물론, 크기 때문에 모든 화기와 포문의 집중 사격을 받기에 완벽한 표적을 스스로 내주는 꼴이 되었다. 이탈리아군의 방진이 포화에 무너지기 시작할 무렵, 유능한 지휘관 요한 프리드리히 폰 모어(Johann Friedrich von Mohr) 휘하의 오스트리아군은 이탈리아군의 중앙과 우익을 후퇴시키는 데 성공했다.
뮈라는 패배했다. 설상가상으로, 별도로 파견했던 감시 사단마저 격파당했다는 소식이 전령을 통해 전해졌다. 포위될 것을 두려워한 그는 후퇴를 명령했지만, 후방에 영국군이 상륙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군대는 완전히 와해되고 만다.
처형대까지의 마지막 길
이틀간의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은 800명을 잃은 반면, 상대는 4,120명의 손실을 입었다. 그리고 패배 후 수천 명이 탈영하면서 뮈라의 군대는 해체되었다. 뮈라 자신은 어떻게든 코르시카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워털루 전투 전에 나폴레옹에게 복귀를 탄원했지만, 황제는 배신자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후 뮈라는 귀환한 부르봉 왕 페르디난도에 맞서 민중의 지지를 얻어 나폴리 왕좌를 되찾으려 했다. 그러나 참담하게 실패했고, 체포된 그는 1815년 10월 13일 처형당했다. 그는 눈가림을 거부하고 스스로 "발사!"라고 외치며 병사들에게 얼굴이 아닌 심장을 겨누라고 명령하는 담대한 모습으로 최후를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