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9년 말, 프랑스의 상황은 파탄 지경에 이르렀다. 행정은 무정부 상태였고, 세금은 국고로 들어오지 않았으며, 약탈이 횡행하고 도로는 파손되었으며, 전쟁으로 국경 지대는 황폐해졌다. 무역은 최악이었고, 리옹의 비단 산업을 비롯한 공업은 망했으며, 실업이 급증하고 빵값은 노동자들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치솟았다. 병원마저 제 기능을 못 하던 바로 그 시기에, 당시 혁명 장군이던 보나파르트는 이집트 원정군을 버리고 파리로 돌아와 1799년 11월 10일(브뤼메르 18일) 쿠데타를 일으켰다.
혁명을 제도화한 통령 정부
이탈리아 원정의 승리와 이집트 원정의 명성으로 둘러싸인 그는 거의 저항 없이 권력을 잡았고, 여론도 이를 부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공화파는 우려했다. 나폴레옹이 혁명을 정착시켰는가, 아니면 혁명의 유산을 파괴했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는 공화정을 끝내고 혁명 운동을 멈추었지만, 혁명 자체를 멈춘 것은 아니었다. 통령 정부는 혁명의 유산을 제도화하는 세 단계였다.
영속적인 제도의 창설
통령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일련의 조치를 통해 혁명을 시간에 정착시켰다. 첫째, 그는 오늘날까지 존속하는 새로운 제도들을 만들었다. 그가 기초한 새 헌법은 입법부보다 행정부를 강화하고, 전문화되고 표준화된 국장국과 부처(푸셰가 맡은 새로운 내무부 포함)로 구성된 중앙 집권적 행정을 창설했다. 혁명기에 만들어진 행정 구역도 유지했다. 이러한 견고한 제도들은 국가 권위를 강화하고 국가를 되살리며, 구제정(앙시앵 레짐) 복귀의 위험을 더욱 멀어지게 했다. 국고는 다시 채워졌다.
혁명의 논리적 연속선상에서
둘째, 나폴레옹은 혁명의 연장선상에 섰다. 쿠데타 후 제도는 바뀌었지만, 주요 직책을 맡을 인물들 대부분은 총재 정부 시절부터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다. X년 헌법(1802년)에 의해 구성된 원로원, 호민관, 국무위원 대다수가 전 정권에서 요직을 맡았던 이들이었고, 현(데파르트망)의 장인 지사(프레페)들도 혁명 의회 출신들로부터 선발되었다. 이는 보나파르트가 반대파를 더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게 했다.
그가 시행한 개혁들은 이미 혁명기에 착수된 것들의 논리적 귀결이었다. 그에게 돌려지는 재정·상업 개혁 중 일부는 총재 정부 구성원들이 이미 구상했던 것들이다. 총재 정부는 나폴레옹이 1806년 영국을 상대로 실행할 대륙 봉쇄령을 이미 시도한 바 있었다. 나폴레옹의 발명으로 알려진 특정 전술들조차 이미 혁명 전쟁 시기에 적용된 것들이었다. 프랑스 민법전 편찬 작업 자체도 혁명기에 이미 시작되었었다.
또한 그는 왕당파 봉기 지역인 방데와의 평화 협정(1799년 12월)을 통해 국내를 평정함으로써 정치적 지형을 안정시키고, 자신의 정부의 장기 존립을 보장했다. 그 어떤 정부도 이루지 못했던 성과였다.
교화조약과 왕당파의 무력화
1801년 교화조약(콩코르다트) 체결로 나폴레옹은 그동안 망설이던 수많은 가톨릭 신자들의 지지를 확보했고, 왕당파는 그만큼의 지지 기반을 잃었다. 혁명의 반가톨릭적 성격이 왕당파 지지의 근본 이유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이 교화조약은 가톨릭을 국교로 선포하지 않았고 구제정 회귀의 의도로 비칠 수도 있었으나, 보나파르트에게 새로운 정통성과 강화된 권위를 부여했다. 교화조약은 국유재산 매각을 유지시켰다. 이 두 조약(방데 평화, 교화조약)으로 보나파르트는 왕당파 반대 세력을 무력화하고 혁명의 유산 속에 자신을 위치시켰다.
프랑스 민법전: 혁명의 결정체
마지막으로, 프랑스 민법전(나폴레옹 법전)은 혁명적 산물이다. 1800년 착수되어 1804년 공포된 이 법전은 기존의 모든 법을 대체했으며, 능력주의, 균등 과세, 징병제, 기업 및 경쟁의 자유, 노동의 자유를 유지하고, 봉건 귀족제의 소멸을 확정했으며, 원칙적으로 법 앞의 평등을 성문화했다. 이 모든 혁명의 성과를 법전 속에 보존하고 성문화함으로써, 나폴레옹은 그것들이 정권 교체를 넘어 영속할 수 있게 했고, 대다수 국민을 안심시켰다.
억압된 혁명의 성과들
그러나 나폴레옹은 적지 않은 혁명의 성과를 억압하기도 했다. 우선 혁명적 숭배 의식들이 폐지되었다. 표현·집회·이주·출판의 자유가 억압적인 국가 체제와 푸셰가 총괄한 강화된 주민 감시 체제 앞에서 사라졌다. 민법전에 선포된 평등은 지켜지지 않았다: 아내는 남편에게 종속되었고, 고용주는 노동자에게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으며, 노동자 수첩은 그들을 준농노 상태로 전락시켰고, 식민지에서는 노예제가 부활했으며, 공무원은 사법 특권을 누렸다.
지사(프레페) 제도는 구제정의 총독(앵탕당)과 다름없었고, 국무원은 왕의 회의(왕정회의)와 흡사했으며, 명망가(노타블) 기반의 새로운 귀족층 창설, 조작된 국민투표(투표 조작, 비밀 투표 없음, 기정사실 추인)는 자코뱅파로 하여금 최악을 우려하게 만들었다. 군주정 복고의 망령이 그들을 괴롭혔다.
공화정의 종언과 제정의 수립
결국 제1통령, 종신 통령, 황제로 오르며 그는 공화정을 끝냈다. 여론의 지지를 등에 업고 제8년 헌법(1799년)을 제정해 실질적 권한을 장악했고, 국민 주권 개념을 헌법에서 삭제했다. 이 헌법은 입법부를 분할하여 그 영향력을 완전히 무력화시켰다. X년(1802년) 종신 통령 직책은 공화정의 종언을 고했다. 그럼에도 1804년 황제 대관식 때 그는 혁명의 정신을 존중했다. 제1통령과 황제의 차이는 본질적으로 상징적인 것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체제 변화는 나폴레옹으로 하여금 성공과 실패에 덜 의존하게 만들었고, 유럽의 다른 군주들에 비해 또 다른 차원을 부여했다. 나폴레옹은 이렇게 적지 않은 혁명의 성과를 일시적으로 매장했다.
혁명 운동의 정지, 혁명의 확산
나폴레옹은 혁명 운동을 멈췄지만 혁명 자체를 멈추지는 않았다. 국유재산 매각, 해상·대륙의 평화, 능력주의적 귀족 창설 등으로 부르주아지의 신임을 얻고, 마렝고 전투(1800년) 같은 대승의 명성, 1802년 기근과 실업 위기의 성공적 수습으로 대중적 지지를 확보하며, 그는 더 이상 혁명 과정이 필요 없는 존재가 되었다. 세월이 흐르며 인기가 지속되자 그는 권력을 키우고 공화정에서 멀어졌다. 1804년, 암살 기도 사건들과 영국의 전쟁 재개 속에서 그는 혁명의 적들에 대한 유일한 방파제로 인식되었고, 세습 문제가 현안으로 떠올랐다. 그는 이 기회를 잡아 황제에 올랐고(아니, 스스로 왕관을 썼다).
이는 폭군의 야망 완성이 아니었다. 대관식에서 그는 혁명의 연속성임을 선언했고, 혁명가들 스스로 그를 지지했다. 혁명 과정은 끝났지만 말이다.
제국 전쟁과 혁명의 유럽 확산
제국 전쟁은 혁명을 영속시켰다. 정복한 모든 나라에 나폴레옹 1세는 민법전을 강제했고, 그 안에 담긴 모든 혁명적 개념들을 이식했다. 그는 처음에 유럽의 해방자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제4차 대프랑스 동맹(1806년~)부터 이 전쟁의 목적은 더 이상 혁명 이념의 전파가 아니었다. 1815년 나폴레옹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자유와 평등의 이념은 정복당했던 나라들에 깊이 뿌리내렸고, 19세기 내내 수많은 변혁을 촉발했다.
프랑스와 유럽 제도의 현대화, 국내 평정, 군사적 승리와 유럽 대부분 정복을 통해 나폴레옹은 혁명의 확대와 영속을 가능케 했다. 따라서 19세기 숱한 체제 변동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민법전은 유럽 전역에서 효력을 유지했고, 그 안에 담긴 수많은 혁명적 원칙들도 살아남았다. 공화정을 포기한 대가를 치렀음에도, 나폴레옹은 혁명의 암살자라기보다 계승자에 가깝다. 혁명 자체를 위태롭게 하던 일부 혁명적 성과(혁명적 숭배 등)를 과감히 포기함으로써, 다른 핵심적 성과들이 시대를 건너뛸 수 있게 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