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의 기병 장군, 장 조제프 앙주 도플 백작(Jean-Joseph-Ange d'Hautpoul)
장 조제프 앙주 도플 백작은 1754년 5월 13일 프랑스 카위자크쉬르베르(Cahuzac-sur-Vère)에서 태어나 1807년 2월 13일 프로이센 보르넨(Vornen)에서 숨진 프랑스의 기병 장군입니다. 귀족 가문의 후손이었지만 프랑스 혁명의 격변기를 살아남아, 혁명전쟁과 나폴레옹 전쟁에서 뛰어난 기병 지휘관으로 이름을 떨쳤습니다.

장 조제프 앙주 도플 백작
살레트 성에서 태어난 귀족 장교
도플은 살레트 성(Château de Salettes)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15세의 어린 나이에 코르시카 군단에 입대하며 군 경력을 시작했고, 1777년부터 1792년까지는 랑그독 연대에서 젊은 귀족 장교로 복무했습니다. 프랑스 혁명전쟁이 발발할 당시 그는 이미 대령 계급에 올라 있었습니다.
혁명 정부가 귀족 출신 장교들에게 깊은 의심을 보내던 시절, 수많은 귀족 장교들이 망명하거나 파면되었지만 도플의 경우는 달랐습니다. 병사들의 진심 어린 신뢰 덕분에 그는 부대 지휘권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고, 이후에도 늘 최전선에서 병사들과 함께 싸우는 지휘관으로서 명성을 쌓아갔습니다.
혁명전쟁에서 쌓은 명성
1794년 6월 26일 플뢰르스(Fleurus) 전투에 참전한 그는 1794년부터 1795년까지 상브르에뮈즈군(Armée de Sambre-et-Meuse)의 선봉 기병대를 지휘했습니다. 1796년 6월 4일 알텐키르헨(Altenkirchen) 전투에서 부상을 입었지만, 같은 해 사단장으로 승진하고 기병 감찰관에 임명되었습니다.
1797년 4월 18일에는 노이비트(Neuwied)에서 라인강 도하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했습니다. 그러나 이후 르페브르(Lefebvre) 원수, 그리고 주르당(Jourdan) 장군과는 계속 불화를 겪었습니다. 특히 1799년 3월 25일 슈토크아흐(Stockach) 전투의 실패 책임을 주르당이 도플에게 돌리려 들면서 갈등이 극에 달했으나, 도플은 군사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습니다.
이후 1800년에는 엥겐(Engen), 비버라흐(Biberach), 호엔린덴(Hohenlinden) 전투에서 연달아 공을 세웠으며, 기병 총감찰관으로 임명되어 프랑스 기병 전력 강화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아우스터리츠와 예나의 영웅
1805년 12월 아우스터리츠(Austerlitz) 전투에서 도플은 결정적인 순간에 기병 돌격을 지휘해 러시아군 중앙을 파고들었고, 승리에 지대한 공헌을 했습니다. 1806년 5월에는 원로원 의원에 임명되었으며, 프로이센 원정에서는 중기병 사단의 지휘를 맡았습니다.
1806년 10월 예나(Iena) 전투에서 그의 과감한 중기병 돌격은 이미 붕괴 조짐을 보이던 프로이센군을 완전히 궤멸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에일라우에서의 최후와 불멸의 유산
1807년 2월 에일라우(Eylau) 전투에서 도플은 세 번째 돌격을 직접 이끌다 적의 포탄에 치명상을 입었습니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52세의 나이로 보르넨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나폴레옹은 그의 희생을 기리기 위해 팡테옹(Panthéon) 안장을 명했고, 에일라우에서 노획한 적군 대포를 녹여 그의 동상을 세우라고 명령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이 동상 제작 명령은 끝내 실행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이름 'HAUTPOUL'는 파리 에투알 개선문(Arc de Triomphe de l'Étoile)에 새겨져 오늘날까지 그의 용맹함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에일라우 전투에서 지휘하는 도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