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피에르 다루 백작 — 나폴레옹 제국의 군수 행정가

피에르앙투아누노엘 브뤼노 다루 백작 (1767–1829)

피에르앙투아누노엘 브뤼노 다루(Pierre-Antoine-Noël Bruno Daru) 백작은 1767년 1월 12일 프랑스 몽펠리에에서 태어나 1829년 9월 5일 뫼랑(Meulan) 근교의 베슈빌 성에서 생을 마감한 군인 출신의 행정가이자 정치가입니다. 그는 나폴레옹 시대 프랑스 군대의 재정과 보급을 책임진 핵심 인물로 평가받습니다.

피에르 다루 백작 — 나폴레옹 제국의 군수 행정가

혁명기와 집정정부 시기

다루는 1784년부터 지방 전쟁 위원으로 재직했으며, 1792년에는 재정 위원으로 임명된 뒤 브레스트와 셰르부르 연안군의 참모장을 맡았습니다. 공포정치기에 한동안 체포되었으나 1795년 초 복권되었고, 이듬해 전쟁부 국장으로 승진했습니다. 18프뤼티도르 쿠데타 직후 페티에(Petiet)가 파면되자 그는 헬베티아군 참모장으로 다시 발탁되었습니다. 보나파르트의 쿠데타 이후에는 전쟁부 국장, 열병 검열관, 전쟁부 사무총장 등 요직을 두루 거쳤으며, 1802년에는 호민원(트리뷰나) 의원에 선출되었습니다.

제정기의 전성기

청렴성과 탁월한 행정 능력을 갖춘 인물이었던 다루는 1803년 불로뉴 진영의 조직을 담당하며 영국 상륙 작전의 물적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1805년에는 국참사원 의원 겸 왕실 재정 총관리관이 되었고, 1806년에는 연구원(Institut) 회원으로 선출되었으며 같은 해 10월에는 대육군(Grande Armée) 군수 총감이라는 중책을 맡았습니다. 1809년에는 황제 가정 총괄 관리관 겸 제국 백작에 올랐고, 전쟁 재정과 군대 보급 전반을 총괄하는 실질적 축으로 부상했습니다. 1811년 4월 17일에는 국무 장관으로 임명되며 경력의 정점에 도달했습니다.

러시아 원정과 프랑스 방어

흥미롭게도 다루는 러시아 원정 자체에는 반대 입장이었지만, 원정의 물적 준비와 조직은 그의 손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는 황제를 따라 모스크바까지 행군했으며, 병든 뒤마(Dumas)를 대신해 대육군 군수 총감직을 수행했습니다. 독일로 철수한 뒤에는 궤멸한 대육군의 재편성과 재무장을 책임졌습니다. 1813년 6월 2일에는 뒤록(Duroc)의 전사 이후 예비 금고 관리 업무까지 추가로 떠안았고, 같은 해 11월 20일에는 전쟁 행정 장관으로 임명되어 프랑스 방어를 위한 제3군 창설과 장비 보급을 준비해야 했습니다. 1814년 3월 말에는 황후 마리루이즈를 따라 블루아까지 동행했습니다.

왕정복고와 말년

루이 18세는 다루를 위해 '국왕 군대 총관리관'이라는 새 직책을 만들어 그의 능력을 인정했습니다. 그럼에도 다루는 백일천하 기간 동안 전쟁부 산하 국무 장관 칭호를 수락했습니다. 1816년에는 프랑스 학사원(Académie française) 회원이 되었고, 1819년에는 프랑스 귀족원 의원에 임명되어 자유주의 사상을 적극적으로 옹호했습니다.

나폴레옹이 남긴 평가

『생텔렌 회상록(Mémorial de Sainte-Hélène)』에 따르면 나폴레옹은 다루에 대해 "지극히 청렴하고 믿음직하며 대단히 부지런한 사람"이라고 평가했습니다. 특히 모스크바 후퇴 당시 다루의 확고한 태도가 돋보였으며, 이후 황제는 여러 차례 "그는 소의 성실함에 사자의 용기를 더한 사람"이라고 그를 칭송했다고 전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