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베스피에르의 죽음, 그리고 분위기의 전환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가 단두대에서 최후를 맞이하면서, 산클로트(무산층)의 독재도 함께 막을 내렸다. 국민공회는 덕성 면에서는 한 걸음 물러난 듯했지만, 이제는 자유롭게 자신들의 생각을 말할 수 있는 의회로 거듭났다. 다만 그 의석에는 기회주의자와 투기꾼들이 많이 앉아 있었다.
테르미도르 9일(1794년 7월 27일)의 쿠데타 이후 새로운 정신 상태가 나타났다. 물론 구체제(Ancien Régime) 시절로의 회귀는 아니었지만, 이른바 '황금 청춘'이라 불리던 젊은이들은 도덕적으로 의심스러운 쾌락적 삶을 만끽했다. 돈과 내기가 더 이상 수상쩍은 행위로 여겨지지 않는 시대였다. 한마디로, 팽팽하게 조여졌던 용수철이 느슨해진 것이다.
공포정치 체제의 해체
혁명의 악령을 완전히 쫓아내기 위해서는 공포정치(테러)가 세워둔 틀을 해체해야 했다. 공공안전위원회의 권한은 축소되어 전쟁과 외교 문제만 담당하도록 제한되었다. 치안은 일반안전위원회에 넘겨졌고, 행정 전반은 13개 위원회가 분담했다.
정치 체제 역시 근본적으로 재편되었다. 전능한 위원회 안에서 교묘한 인물들이 다시 지배력을 행사하는 일을 막기 위해, 오직 국민공회만이 통치한다는 원칙이 세워진 것이다. 아울러 용의자법, 프레리알 22일의 법, 최고가격제 등이 잇달아 폐지되었다.
여론이 공포정치의 종식을 확실히 확인할 수 있도록, 1794~1795년의 대표적 처형 집행자들이 기소되었다. 카리에, 르본, 푸키에탱빌이 혁명재판소에 회부되어 처형되었다. 용의자들로 가득 차 있던 감옥들은 문을 열었고, 마담 드 스탈과 마담 탈리앵의 살롱에는 다시 지식인 엘리트들이 모여들었다.
기근과 민중 봉기
그러나 기근은 계속되었고, 곧 새로운 민중 소요가 터져 나왔다. 1795년 4월 1일(게르미날 12일), 굶주린 군중이 빵과 일자리를 요구하며 국민공회를 습격했다. 진압된 이 폭동은 결국 바레르, 콜로 데르부아, 비요바렌 등 전직 아코뱅파의 체포와 프랑스령 기아나 카옌으로의 추방으로 이어졌다.
같은 해 5월 20일(프레리알 1일)에는 두 번째 봉기가 일어났는데, 이전보다 훨씬 더 격렬했다. 수 시간에 걸친 전투 끝에야 진압되었고, 이번에도 전직 아코뱅파 여섯 명이 체포되어 유죄 판결을 받았다.
백색 테러와 왕당파의 반격
소요의 행진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공포정치로 심각한 피해를 입었던 남동부 지역의 왕당파들은 반혁명에 돌입했고, 그 과잉과 잔혹함은 1792년 9월 학살에 결코 뒤지지 않았다. 이른바 '백색 테러'였다. 파리조차 그 예외가 아니었다.
1795년 10월 5일(방데미에르 13일), 왕당파는 1792년 여름의 그 날과 흡사한 파리 봉기를 일으키기로 결심했다. 3분의 2 법령, 즉 국민공회가 개선될 때 기존 의원의 3분의 2가 새 의회에도 계속 참석하기로 한 결정의 폐지를 노리고, 대부분 왕당파인 반군은 국민공회로 진군했다. 그러나 준비가 부실하여 이 봉기는 좌절되었고, 생로슈 성당 앞에서 젊은 포병 장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포격에 의해 분쇄되었다.
한 달 남짓 후, 테르미도르 국민공회는 새 헌법, 즉 총재정 헌법(열사 3년, 1795년)을 작성하고 채택한 뒤 해산했다.
테르미도르 국민공회가 남긴 유산
심각한 경제·금융 위기, 무원칙한 정치인들의 발작적인 투기, 반(反)아코뱅 조치(정치 클럽의 폐쇄, 인민사회의 소멸, 혁명 운동 구조의 개편)와 왕당파의 위협(생로슈 성당 앞 광장과 키베롱 반도에서 모두 격퇴됨) 사이에서 어려운 균형을 유지해야 했음에도, 테르미도르 국민공회는 총재정에게 중대한 지적·사회적 유산을 물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