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프랑스 혁명: 군주제의 종언과 루이 16세의 죽음

군주제 폐지와 제1공화국의 선포

프랑스 혁명: 군주제의 종언과 루이 16세의 죽음

1792년 9월 21일, 국민공회는 먼저 왕정 폐지를 비준하기로 결정했고, 이튿날인 9월 22일에는 프랑스 제1공화국의 탄생을 정식으로 선포했습니다. 그러나 새로 구성된 의회에게 진정으로 중요한 현안은 단연코 국왕의 운명이었습니다.

철제 서랍장(아르무아르 드 페르)*에 숨겨진 문서들을 검토한 국민공회는 권력분립이라는 근본 원칙을 과감히 무시하고 스스로 재판권을 장악하여, 루이 16세에 대한 재판을 즉각 준비하기로 결정했습니다. 1792년 12월에 개시된 루이 16세의 재판은 이듬해 1월, 사형 판결이라는 결말로 막을 내렸습니다.

1793년 1월 21일, 국왕은 단두대에 올랐습니다.

처형이 초래한 두 가지 위기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처럼 엄청난 파장을 일으킨 행위는 곧바로 젊은 공화국 앞에 두 가지 새로운 난관을 안겼습니다. 하나는 제1차 대프랑스 동맹*의 결성이었고, 다른 하나는 주로 서부 여러 지방에서 시작된 심각한 반란이었습니다.

여기에 뒤무리에 장군의 배신과 그에 따른 침략 위험까지 더해졌으며, 지롱드파와 몽타냐르파 사이의 내분이 격화되면서 공화국은 실질적인 존립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지롱드파의 몰락과 산악파 독재의 시작

파리 각 구역(섹시옹)들의 과격 행보에 분노한 지롱드파는 마라*의 체포를 관철시켰고, 5월 18일에는 코뮌의 움직임을 감시하는 '열두인 위원회'를 설치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빠르게 나타났습니다. 마라는 곧 복권되었고, 열두인 위원회는 설치된 지 채 열흘이 지나지 않아 해체되었으며, 오히려 지롱드파가 위협받는 입장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며칠간 위원회를 복원시키는 데 성공했으나, 결국 지롱드파의 온건파인 브리소탱(브리소파) 소속 의원 29명이 단두대로 끌려가는 비극을 맞았습니다. 이로써 몽타뉴(산악파)의 독재 시대가 본격적으로 막을 올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