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뇌르틀링겐 언덕의 대학살…다수는 전사하고 소수는 포로가 되다

뇌르틀링겐 언덕의 대학살…다수는 전사하고 소수는 포로가 되다

종교를 넘어선 권력 다툼, 30년 전쟁

30년 전쟁(1618~1648)은 인류 역사상 가장 참혹한 분쟁 중 하나였다. 제1차 세계대전에 버금가는 약 800만 명에 달하는 인명 피해를 남긴 이 전쟁은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의 '종교 전쟁'으로 규정되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클라우제비츠의 해석처럼 모든 전쟁이 그러하듯, 이 전쟁 역시 '다른 수단으로 계속된 정치'에 불과했다. 그 핵심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권력을 약화시키는 것이었다.

전쟁은 여러 국면으로 전개되었지만, 초기 합스부르크의 승세는 스웨덴 국왕 구스타프 아돌프와 그가 이끄는 강력한 군대의 개입으로 무너졌다. 국왕이 전사한 뒤에도 스웨덴군은 프랑스의 금전 지원(가톨릭 국가 프랑스가 반(反)가톨릭 진영을 돕는 아이러니!)에 힘입어 전쟁을 계속하며 적들을 공포에 떨게 했다. 그러나 1634년까지 유럽에서 거의 무적이었던 스웨덴 군대(병사 상당수는 독일 용병과 스코틀랜드인이었다)는 최악의 패배를 맞이했고, 프랑스의 자금이 없었다면 이 패전으로 전쟁에서 완전히 이탈했을 정도였다.

기동과 병력

국왕의 목숨을 앗아간 뤼첸 전투(1632) 이후 스웨덴군은 혼란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마침내 1634년, 스웨덴 출신(핀란드계) 장군 구스타프 호른이 지휘하는 슈바벤군과 작센바이마르 공 베른하르트가 이끄는 프랑켄군 등 독일 개신교 연합군과 함께 남부 독일로 진격했다. 목표는 합스부르크의 확고한 동맹국인 바이에른을 불과 철(火與鐵)로 응징해 전쟁에서 영구히 배제하는 것이었다.

이 위협은 외면할 수 없을 만큼 심각했다. 이에 합스부르크는 페르디난트 왕세자(훗날의 황제 페르디난트 3세) 휘하에 오스트리아-독일 혼성군 18,000명을 조직해 보헤미아에서 진군, 스웨덴 연합군의 보급로 차단을 시도했다. 적의 움직임을 파악한 호른은 수적 우위를 바탕으로 오스트리아-독일군을 섬멸하기 위해 북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호른이 이런 결정을 내린 데에는 또 다른 사정이 있었다. 스페인 국왕의 아들이자 스페인 추기경 페르디난트(추기경 인판테)가 이끄는 또 다른 적군 15,000명이 이탈리아에서 바이에른으로 접근 중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적군을 차례로 격파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그의 기동은 충분히 빠르지 않았다. 오스트리아-독일군은 개신교 연합군이 장악한 뇌르틀링겐 시까지 진격해 포위했고, 이윽고 추기경 페르디난트의 스페인군도 도착했다.

이로써 오스트리아-독일군과 스페인군이 합류해 보병 20,000명, 기병 13,000명, 포 50문의 대군을 이루었다. 9월 5일, 호른은 작센바이마르 공과 함께 보병 16,300명, 기병 9,300명, 대포 68문을 이끌고 이들에게 맞섰다. '스웨덴군'은 수적으로 열세였지만 포술과 병력의 일부 질에서 우위였기에 호른은 공격을 결심했다.

피 흐르는 전투

호른과 작센바이마르 공은 모두 노련한 장군이었다. 따라서 두 사람은 압도적이지 않은 적군의 수적 우위(25,600명 대 33,000명)를 두려워하지 않고 결전을 택했다. 그러나 험준한 지형 탓도 있어, 보병과 함께 3파운드 직접지원포를 운용하지 못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이 경야포는 어느 전투에서든 '스웨덴식' 보병 전술의 전력 증폭기 역할을 해왔던 터였다.

두 페르디난트는 군대를 도시 서쪽에 배치했다. 좌익은 함하임 마을 북쪽 언덕과 작은 레츠바흐 강에 기대도록 하고, 그곳에 포병과 보병의 상당 부분을 배치한 뒤 좌우를 기병으로 지원하게 했다. 우익에는 피콜로미니 장군의 독일 기병이 자리했다. 나머지 보병은 중앙에 기병과 포병의 지원을 받으며 전열을 폈다. 극우익에는 유명한 '크로아티아' 경기병(발칸 출신 기병으로, 훗날 후사르의 '조상' 격)이 배치되었다.

개신교 측 장군들은 각자 군대의 한쪽 날개를 맡았다. 호른은 우익을 담당해 보병-기병-보병-기병 순의 네 줄 전열을 편 뒤, 적 좌익이 의지한 언덕을 점령하는 임무를 짊어졌다. 작센바이마르 공은 나머지 병력으로 좌익을 맡았다. 호른의 계획은 단순했다. 언덕의 적을 격파한 뒤 남에서 북으로 적군을 '포위'하고, 작센바이마르 공이 정면에서 묶어주겠다는 것이었다.

언덕 위의 학살

9월 6일 새벽, 호른은 공격을 개시했다. 그러나 처음부터 순탄하지 않았다. 적 포격에 몰린 기병이 먼저 움직여 보병을 노출시켰고, 숲을 통과하던 보병 중 한 여단은 아군을 적으로 착각하고 발포해 버렸다!

그럼에도 호른은 전열을 정비해 공격했고, 첫 돌격으로 언덕을 거의 점령할 뻔했다. 그러나 추기경 페르디난트는 당황하지 않고 즉시 명성 높은 스페인 테르시오를 호른의 부대에 투입했다. 격렬한 백병전이 벌어졌다. 호른의 병사들은 언덕을 향해 15차례에 걸쳐 연이어 돌격했지만, 피콜로미니 기병의 능숙한 지원을 받는 테르시오는 끝내 흔들리지 않았다.

한편, 작센바이마르 공이 공격하지 않고 오히려 호른에게 증원을 보내 스스로 전력을 약화시키고 있는 것을 본 페르디난트 왕세자가 공세에 나섰다. 오스트리아-독일군이 일제히 밀고 나오자 작센바이마르의 부대는 순식간에 완패해 도주했고, 이로써 아직 언덕에서 싸우던 호른 군의 측면이 그대로 드러났다. 곧 고립된 호른의 병사들은 수백 명씩 학살당했고, 살아남은 이들은 항복했다.

호른 본인도 포로로 잡혔다. 이 전투는 개신교 진영에 완전한 재앙이었다. 전투에 참여한 25,600명 가운데 약 17,000명이 전사하고 4,000명이 포로가 되었다. 패자의 사상자가 이토록 많은 것은 그들의 완강한 저항을 보여주는 동시에, 승자의 압도적인 물량을 방증한다. 승자의 피해는 전사 약 1,500명, 부상 약 2,000명에 그쳤다. 그러나 프랑스 덕분에 이 대승은 전쟁의 종결로 이어지지 못했다.

뇌르틀링겐 언덕의 대학살…다수는 전사하고 소수는 포로가 되다

뇌르틀링겐 언덕의 대학살…다수는 전사하고 소수는 포로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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