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나폴레옹 3세: 제2제국의 건설자이자 최후의 군주

나폴레옹 3세(Napoleon III)는 1848년 프랑스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 1852년 제2제정을 선포하고 '나폴레옹 3세'라는 이름으로 프랑스를 통치한 최후의 군주다. 본명은 루이-나폴레옹 보나파르트(Louis-Napoléon Bonaparte, 1808년 4월 20일~1873년 1월 9일)이다.

가문과 출생

보나파르트 가문 출신으로, 나폴레옹 1세의 동생이자 홀란드 국왕이었던 루이 보나파르트와 조제핀 황후의 딸 오르탕스 드 보아르네 사이에서 태어났다. 형과 라이히슈타트 공작(나폴레옹 2세, '독수리')이 차례로 사망하면서 보나파르트 가문의 적통 계승자가 되었다.

청년기와 초기 쿠데타 시도

망명 생활과 교육

1816년 보나파르트 가문 추방령에 따라 어머니 오르탕스와 스위스로 망명했다. 1817년 아레넨베르크 성을 구입해 정착했으며, 나폴레옹 1세의 전직 장교로부터 군사 교육을 받는 등 황제의 후계자로서 자랐다. 1830년 스위스 군대에 자원입대해 1834년 포병 대위가 되었고, 1832년 투르가우 주에서 스위스 국적을 취득해 "프랑스를 통치한 유일한 스위스인"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스트라스부르 쿠데타 (1836년)

1832년 라이히슈타트 공작 사망 후 스스로 황위 계승자라 자처하며 권력 장악을 시도했다. 1836년 10월 30일 스트라스부르에서 주둔군을 봉기시켜 파리로 진격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루이 필리프 왕은 법적 절차 없이 그를 로리앙으로 압송한 뒤 미국행 배에 태워 추방했다. 이 사건으로 그는 프랑스 내 보나파르티스트의 상징적 인물로 부상했다.

불로뉴 쿠데타와 함 요새 투옥 (1840년)

미국 체류를 잠시 한 뒤 영국 런던으로 거처를 옮겼다. 1840년 나폴레옹 1세의 유해 송환으로 보나파르트 열기가 고조되자, 8월 6일 불로뉴쉬르메르에 상륙해 제42연대를 포섭하려 했으나 다시 체포되어 함 요새에 종신형으로 수감되었다. 재판에서 그는 인민 주권과 제국 대의를 대변한다며 웅변을 펼쳤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옥중 저술과 탈출

함 요새에서 《빈곤의 소멸(De l'extinction du paupérisme)》(1844)을 집필해 생시몽주의 사상에 입각한 대중 정치의 비전을 제시했다. "오늘날 계급의 시대는 끝났으며, 대중과 함께해야만 통치할 수 있다"는 유명한 구절을 남겼다. 1846년 화가 바댕게(Badinguet)의 복장과 서류를 빌려 탈출, 런던으로 망명했다가 1848년 2월 혁명 소식을 듣고 귀국했다.

공화정 대통령 (1848~1852)

1848년 6월 제헌의회 의원(4개 주 당선)으로 선출되었고, 12월 10일 프랑스 사상 최초의 보통선거로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약 75%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보수파(질서당)의 지지와 좌파 분열, 그리고 일부 농민이 나폴레옹 1세로 착각해 투표한 효과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12월 20일 취임 선서 후 엘리제 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의회와의 대립과 입지 강화

1848년 헌법은 대통령 권한을 의회와 국무위원회에 크게 제약했다. 루이-나폴레옹은 1849년 5월 선출된 보수적 의회와 충돌했다. 로마 공화정 진압을 위한 파병, 종교 교육에 유리한 팔루 법안 통과 등에서 의회와 대립각을 세웠다. 1850년 5월 31일 의회가 3년 거주 요건을 부과해 유권자 300만 명을 삭제하는 선거법 개정을 단행하자, 이에 반대하며 스스로 '인민의 수호자'로 포지셔닝했다.

1851년 12월 2일 쿠데타

임기 연장 개헌안이 의회에서 부결되자, 1851년 12월 1~2일 밤(나폴레옹 1세 대관식 47주년이자 아우스터리츠 전투 46주년) 계엄령을 선포하고 의회를 해산하며 보통선거를 복원했다. 일부 지방(욘, 바잘프, 바르, 로트에가론)에서 봉기가 있었으나 강경 진압했고, 12월 20~21일 국민투표로 새 제도를 추인받았다. 1852년 1월 새 헌법으로 대통령 임기를 10년으로 연장했다.

제2제정 황제 (1852~1870)

1852년 11월 7일 원로원 결의로 제정 복고가 결정되었고, 11월 21~22일 국민투표 승인을 거쳐 12월 2일 제2제정을 선포, 나폴레옹 3세가 되었다. 1853년 1월 외제니 드 몬티호(Eugénie de Montijo)와 결혼해 1856년 외아들 외젠 루이 나폴레옹(황태자)을 얻었다.

대외 정책: 영광과 좌절

크림 전쟁 (1854~1856)

프랑스를 유럽 외교 무대 중심으로 복귀시켰다. 초기엔 성과를 거두었으나, 관료와 외교관이 왕당파 위주라 황제의 시저리즘과 마찰을 빚으며 고립을 자초했다.

아랍 정책과 알제리

직접 알제리를 방문해 식민지 개발 모델을 제시했다. "나는 프랑스인의 황제이자 아랍인의 황제다"라고 선언하며, 식민지를 프랑스 국가가 아닌 황제 개인에 귀속시키려 했다. 이는 거의 1세기 뒤 영국 연방(Commonwealth) 모델을 예견한 것이다.

이탈리아 정책

이탈리아 통일을 지지하며 오스트리아와 대립했다. 1859년 이탈리아 전선에서 직접 지휘하며 '자신의 피를 바쳤다'고 자처했고, 그 대가로 1860년 니스 주와 사부아를 국민투표로 병합했다.

멕시코 원정의 실패 (1861~1867)

막시밀리안 대공을 멕시코 황제로 세우려 했으나 미국의 반발과 멕시코 공화파의 저항으로 철수했다.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전쟁에서 '중립의 팁' 정책으로 일관하다 외교적 고립을 심화시켰다. 이 시기 황제의 병세 악화와 측근들의 알력도 겹쳤다.

내치: 근대화와 파리 개조

제정 치하에서 프랑스는 눈부신 경제 발전을 이뤘다. 은행 제도 정비, 철도망 확충, 대도시 재개발이 이루어졌다. 생시몽주의자 미셸 슈발리에의 영향을 받아 자유무역 정책을 추진, 1870년엔 영국의 산업 수준을 상당 부분 따라잡았다.

런던 체류 경험을 바탕으로 파리를 위생적이고 기능적인 유럽의 수도로 탈바꿈시키려 했다. 오스만 남작에게 파리 개조 사업을 맡겨 대로 개설, 상하수도 정비, 오페라 가르니에 등 공공건물 신축, 몽수리·뷰트쇼몽·부시코 공원 등 녹지 조성을 추진했다. 이 시기 공사가 20세기 파리의 얼굴을 만들었다. 리옹, 비아리츠, 디에프 등 지방 도시에도 같은 정책을 장려했다(당시 '제국 거리'라 명명된 도로들이 훗날 '공화국 거리'로 개명됨).

자유화 전환기 (1860년대 이후)

1855년과 1867년 파리 만국박람회 개최로 파리는 빅토리아 여왕 시대의 런던과 함께 유럽의 문화 수도로 위상을 떨쳤다. 1863~1869년 공교육부 장관 빅토르 뒤뤼(Victor Duruy)가 여중등교육 개방, 초등교육 확대, 근현대사 교육 도입을 추진했다(가톨릭 교회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1869년 공화파 야당 지도자 에밀 올리비에(Emile Ollivier)를 실질적 총리로 기용하며 의회제를 인정했다. 자유 보나파르티스트(중도우파)와 오를레아니스트 자유주의자(중도좌파)로 내각을 구성하고, 권위주의 보나파르티스트(우파)를 배제했다. 올리비에는 황제를 설득해 준의회제 개헌안을 마련, 1870년 5월 8일 국민투표에서 700만 찬성으로 가결시켰다(5월 21일 헌법 공포). 공식 관직 후보제 폐지, 오스만 지사 해임 등 자유화 조치가 뒤따랐다. 그러나 공화파의 불신과 강경파의 도전 속에 올리비에는 황제의 신임만으로 버티는 처지가 되었다.

1870년 보불전쟁과 몰락

올리비에와 황제 모두 평화주의자였으나, 황후 외제니를 비롯한 주전파와 의회 내 공화파(가장 강경한 대프로이센 강경론자)의 압력에 밀려 전쟁으로 치달았다. 스페인 왕위 계승 문제를 둘러싼 긴장 속에서 비스마르크의 '엠스 전보(Ems Dispatch)' 조작에 놀아나 1870년 7월 19일 프로이센에 선전포고했다.

초반 패배의 책임이 황제와 올리비에에게 돌아가자, 8월 9일 의회가 압도적 다수로 올리비에 내각을 무너뜨렸다. 황제는 정치·군사 양면에서 고립무원 상태가 되었다. 9월 2일 세당 전투에서 항복했다. 비스마르크와 돈슈리 마을에서 협상을 시도했고, 빌헬름 1세 국왕 앞에서 프레누아의 벨뷔 성에서 프랑스군 항복 문서에 서명했다. 빌헬름스회에 성(카셀)에 유폐되었다.

9월 4일 파리에서 레옹 감베타 등 의원들이 제3공화국을 선포했으나, 황제 폐위안은 1871년 3월 1일 의회에서 가결되었다. 대부분 지방은 무관심하게 새 정권을 맞이했다. 1871년 3월 폐위 황제는 영국으로 망명했다.

말년과 죽음

1873년 1월 9일 칠스허스트(현 런던 브롬리 구)에서 사망해 안장되었다. 이후 외제니 황후가 판버러의 생미셸 수도원(St Michael's Abbey)에 영묘를 건립해 1920년 황후 사후, 1879년 줄루 전쟁에서 전사한 외아들 외젠 황태자(23세)와 함께 안치했다.

제2제국의 재평가: 번영의 시대

오늘날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제2제정은 프랑스 역사상 가장 눈부신 발전과 번영의 시기였다.

  • 경제: 혁신적 금융·은행·상업 시스템과 근대 인프라를 구축했고, 황제의 의지적 자유무역 정책으로 1870년 영국의 산업적 격차를 상당 부분 좁혔다.
  • 도시계획: 오스만의 파리 개조로 '19세기 중반 유럽에서 가장 더러운 도시'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수도 중 하나로 탈바꿈했다.
  • 문화: 플로베르, 조르주 상공, 공쿠르 형제(에드몽과 쥘) 등 문단이 번성했다. 오페라 가르니에는 '제정의 향연'을 상징하는 문화 공간이었다. 황제 자신도 역사 애호가로 《율리우스 카이사르사》를 저술했고, 생제르맹앙레 국립고고학박물관 창설, 게르골·알레지아·비브락테 발굴 지원으로 프랑스 국립 고고학의 기틀을 닦았다.
  • 사회: 1864년 파업권·노동자 단결권 인정(노조의 시초), 노동자·농민 생활수준 향상, 빈민 급식소 운영, 최초의 산재·장애 보험 도입, 대중교육 확대(특히 외제니 황후 주도로 여자교육 진흥), 루이 파스퇴르(광견병 백신)와 페르디낭 드 레셉스(수에즈 운하, 1869년 개통) 지원 등 업적이 뚜렷하다.

주요 어록

  • "정치에서는 악을 치유해야지, 복수해서는 안 된다." (《나폴레옹의 이념》)
  • "정치적 신앙도 종교적 신앙처럼 순교자를 낳았으며, 사도와 제국도 가질 것이다." (《나폴레옹의 이념》)
  • "세상이 개선될수록 인간을 가르는 장벽은 낮아지고, 공동의 이익으로 뭉치는 나라들은 늘어난다." (《나폴레옹의 이념》)
  • "빈곤이 더 이상 선동적이지 않으려면, 부유가 더 이상 억압적이지 않아야 한다." (《빈곤의 소멸》)
  • "무엇보다 인민을 두려워 말라, 그들은 당신들보다 더 보수적이다!" (《잡록》)
  • "황후는 정통왕당파, 모르니는 오를레앙파, 나폴레옹 왕자는 공화파, 나 자신은 사회주의자다. 유일한 보나파르티스트는 페르시니뿐인데, 그는 미쳤다."
  • "국가의 이익과 군주의 이익이 일치하지 않는 군주여, 화가 있으리라!" (《정치적 몽상》)
  • "보통선거의 물로 세례받고 싶으나, 그 물에 발만 담그고 싶지는 않다."

주요 정부인(정부인·첩)

  • 엘리자베스-앤 해리엇(Elizabeth-Ann Haryett, ~1865), '미스 하워드'로 알려짐. 1848년 대선 자금 지원
  • 아르망스 드퓌유(Armance Depuille, 1830~1913), 프랑수아 이지도르 드퓌유의 아내, 베노니 드퓌유 출산
  • 파스칼리 코르비에르(Pascalie Corbière, 1828~?), 황제의 둘째 마부 오귀스트 코르비에르의 아내, 크리스티앙 코르비에르 출산. 황제의 사생아 유모 역할도 함
  • 비르지니 올도이니, 카스틸리오네 백작부인(Virginie Oldoini, Countess of Castiglione, 1837~1899), 19세기 이탈리아의 유명한 고급 창녀, 1856~1857년 정부인
  • 멜 사브즈(Melle Sauvez), 피카르디 출신 소녀, 함 요새 수감 시절 교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