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발라클라바 전투 – 크림 전쟁의 '얇은 붉은 선'과 경기병여단의 돌격

발라클라바 전투

발라클라바 전투(Battle of Balaklava)는 크림 전쟁 중인 1854년 10월 25일, 세바스토폴을 포위 공격하던 영국·프랑스·오스만(터키)·사르데냐 연합군과 러시아 제국군 사이에서 벌어진 교전입니다. 연합군이 승리를 거두었으나 그 대가가 매우 컸던 '피로스의 승리'로 평가되며, 특히 '경기병여단의 돌격(Charge of the Light Brigade)'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습니다.

전투 개요

일자: 1854년 10월 25일
장소: 발라클라바 인근 (흑해 연안)
결과: 영국 측의 피로스적 승리
교전 세력: 영국 · 프랑스 연합군 vs 러시아 제국

양측 지휘관

연합군: 래글런 경(Lord Raglan), 카디건 경(Lord Cardigan), 스칼렛 경(Lord Scarlett), 자크 르루아 드 생 아르노(Jacques Leroy de Saint Arnaud), 프랑수아 세르탱 칸로베르(François Certain Canrobert)
러시아군: 파벨 리프란디(Pavel Liprandi), 자브로크리츠키(Jabrokristki)

참전 병력과 손실

연합군은 약 2만 명, 러시아군은 약 2만 3천 명이 참전했으며, 전사자는 각각 617명과 627명으로 집계되었습니다.

전투의 배경

연합군이 세바스토폴 주변에 공성 진지를 구축하고 카미에시(프랑스군용)와 발라클라바(영국군용) 두 곳의 보급항을 확보하자, 러시아군은 이 항구를 탈환하기 위해 구원군을 조직했습니다. 보병 4개 연대와 창기병, 후사르, 코사크, 포병으로 편성된 약 2만 5천 명의 대규모 병력이었습니다.

전투 경과

새벽 5시경, 발라클라바 근처에서 울려 퍼진 포성에 연합군은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러시아군은 포병 사거리 밖의 평원에 대군을 전개해 놓고 있었습니다. 리프란디 장군의 초기 목표는 항구를 방어하던 오스만 부대가 지키는 요새 진지(레독트)였으며, 이들은 잉커먼 방면에서 지원을 받은 자브로크리츠키 장군의 보병 2개 연대의 호위를 받고 있었습니다.

터키 부대 외에 항구를 방어하는 병력은 루컨 경 휘하의 영국 기병대—스칼렛 경의 중기병여단과 카디건 경의 경기병여단(약 1,500명)—, 콜린 캠벨 경이 지휘하는 제93 하이랜더 연대(보병 650명), 그리고 해병 100명과 급조 무장을 한 노약자 100명으로 구성된 도시 수비대가 전부였습니다.

공성 진지에서 증원 부대가 파견되었지만 몇 시간 안에는 전선에 투입될 수 없었고, 즉각적인 지원은 오직 포병만이 가능했습니다.

터키 수비대는 이윽고 요새를 내주고 철수했습니다. 한편 하이랜더 연대는 교범대로 4열을 형성하는 대신 2열 종대로 전개해 러시아 기병의 공격에 맞섰고, 고지에서 이를 지켜본 관찰자는 이 대형을 가리켜 훗날 유명해진 표현, "얇은 붉은 선(the thin red line)"이라 불렀습니다.

오전 9시 30분경, 우랄 출신 후사르와 코사크 3,000~4,000명으로 이루어진 러시아 기병이 공세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하이랜더 병사들은 흔들리지 않은 채 마지막 순간까지 사격을 유예했다가 일제히 화망을 퍼부었고, 러시아군의 돌격은 완전히 분쇄되었습니다. 동시에 스칼렛 경의 중기병여단이 반격에 나서 패주하는 러시아 기병을 정면으로 돌파했습니다. 다만 영국군 지휘부는 내부 갈등으로 인해 러시아군을 완전히 격멸할 수 있는 결정적 순간에 추가 추격 명령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경기병여단의 돌격

래글런 경은 러시아군이 요새의 대포를 빼앗아 가지 못하도록 명령을 하달했지만, 명령문이 모호하게 작성되었고 전달 또한 늦어졌습니다. 명령이 도착한 것은 오전 11시, 이미 전황은 크게 바뀐 뒤였습니다. 경기병여단의 위치에서는 요새의 대포가 더 이상 보이지 않았고, 눈에 들어온 것은 기병이 물러난 뒤에 자리한 러시아 포병대뿐이었습니다.

카디건 경은 결국 5개 연대—제13 경용기병, 제17 창기병, 제11 후사르, 제4 경용기병, 제8 후사르—를 이끌고 돌격을 개시했지만, 실제 병력은 불과 660명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기동 자체는 짜임새 있게 수행되었으나 곧바로 러시아 포병의 집중 포화를 받아 기수들이 수십 명씩 쓰러졌습니다. 크게 감소한 여단은 필사적으로 적 포진지에 도달해 포수들을 검으로 베었지만, 러시아 창기병의 역공과 보병 부대와의 접전 끝에 즉각 후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생환한 기병은 단 180명뿐이었고, 이렇게 해서 '경기병여단의 돌격'이라는 전설이 탄생했습니다. 시인 테니슨은 이 사건을 소재로 유명한 시 「경기병여단의 돌격」(1854)을 남겼습니다. 경기병여단은 프랑스 제4 아프리카 엽병(Chasseurs d'Afrique) 연대의 결사적인 지원 덕분에 궤멸적인 궤멸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전투는 결론 없이 양측이 포문을 닫고 하나둘 전장을 이탈하는 가운데 마무리되었습니다. 영국군은 360명, 프랑스군은 약 250명의 손실을 입었으며, 러시아군의 손실은 사상자 수천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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