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바르샤바의 기적 이후, 붉은 군대를 와해시킨 폴란드의 대반격

'후퇴'가 아닌 '궤주', 붕괴의 시작

'후퇴'라는 말로는 소련군의 궤주(潰走)를 온전히 묘사하기에 부족했다. 폴란드군의 강력한 진격 앞에서 소련군은 공황 상태에 빠졌고, 곧이어 와해되기 시작했다. 투하쳅스키는 바르샤바에서 480km 떨어진 민스크의 사령부에서야 18일 밤에 이르러 더 이상 버틸 것이 없음을 깨닫고 전면 후퇴 명령을 내릴 수 있었다.

제3군과 제15군은 폴란드 기동타격부대와 동프러시아 국경 사이, 점점 좁아지는 회랑으로 밀려 들어갔다. 그 뒤에는 제4군과 카프코르(Kavkor)가 시코르스키 부대와 격전을 벌이며 지나치게 앞서 나온 나머지 구원받을 길이 없는 처지가 되었다.

제15군은 하루 평균 25km씩 물러났고, 때로는 추격하는 폴란드군과 거의 몸이 스칠 정도였지만 덕분에 포위망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제16군과 모즈이르 집단의 잔여 병력에게 상황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바르샤바 공략용으로 준비됐던 공성포병은 모조리 잃고 말았다.

벵그루프에서 비아위스토크까지, 격렬한 후위전

벵그루프(Węgrów), 비엘스크(Bielsk), 비아위스토크(Białystok)에서 소련군은 폴란드 독립군과 타격부대 소속 제1레기온사단과 8월 19일부터 22일까지 극심하게 충돌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아직 체계를 유지한 상태로 막대한 손실을 감수하며 포위망에서 벗어나는 데 성공했다.

가이 기병군의 필사적인 돌파

소련 제4군과 카프코르는 완전히 포위된 듯 보였으나, 카프코르는 돌파를 시도했다. 지휘관 가이(Ghai)는 밤을 틈타 병사들을 이끌고 숲과 호수 사이를 지나 폴란드군의 포위망을 빠져나가려 했다. 8월 21일 새벽, 그는 대규모 폴란드 기병대와 마주쳤으나 짙은 어둠 탓에 교전은 벌어지지 않았다.

22일에는 므와바(Mława)에서 네 개 사단에 포위됐지만, 필사적인 야간 공격 끝에 탈출에 성공했다. 이튿날인 23일에는 시코르스키의 의용병 부대와 조우했다. 이 신병들은 앞서 브크라(Wkra) 강 전투에서의 용맹함으로 '러시아의 공포'라는 별명을 얻었지만, 그라보프(Grabów)에서는 카프코르를 위협하지 못했다.

붉은 기병대는 포위망을 돌파했으나 초젤레(Chorzele)에서 폴란드 시베리아 여단에게 큰 타격을 입었다. 8월 24일, 그들은 소련 제53보병사단과 합류해 이틀 더 저항을 이어갔지만 결국 탄약이 바닥나 동프러시아 국경을 넘었고, 독일 영토에서 무장 해제된 뒤 억류되었다.

카프코르 병사들은 포로 2,000명과 대포 11문을 호위한 채 국경을 넘었고, '인터내셔널'을 노래하며 행진했다. 이는 '가이 칸의 유목민 무리'라 불린 그들의 사기를 꺾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반면 제4군은 동프러시아까지 도달하지 못하고 폴란드군에 항복해야 했다.

세계사를 바꾼 바르샤바 전투

바르샤바 전투를 지켜본 영국 외교관 다버넌 경(Lord d'Abernon)은 이 전투를 세계사의 흐름을 바꾼 18대 결정적 전투 중 하나로 평가했다. 당시 유럽 전역에서 폴란드의 패색은 이미 짙다고 여겨졌지만, 전황은 누구도 예상 못 할 만큼 극적으로 뒤집혔다.

전쟁이 끝날 무렵 투하쳅스키가 이끈 5개 군은 병력의 3분의 2를 잃었다. 폴란드 측 발표에 따르면 포획한 전리품은 대포 231문, 기관총 1,023정, 차량 1만 대에 달했으며, 포로 6만 6,000명과 억류자 4만 4,000명이 추가되었다. 폴란드군은 일련의 공세를 큰 실수 없이 치밀하게 수행해냈다.

코마루프의 기병 대결, 코나르미야의 최후

피우수츠키는 남부 전선의 시코르스키에게 오랫동안 기다려온 명령, 즉 부됴니와 그가 이끄는 증오의 대상인 코나르미야(제1기병군)를 처리하라는 지시를 하달했다. 기회는 8월 31일 자모시치(Zamość)~코마루프(Komarów) 일대에서 찾아왔다. 20세기 가장 기이한 전투 중 하나로 기록된 이 교전에서 폴란드 창기병들이 코사크 기병 대군을 향해 정면 돌격을 감행했다.

창기병들이 우위를 점했고, 다른 부대들의 지원까지 더해지면서 부됴니는 코나르미야의 완전한 궤멸을 간신히 피할 수 있었다. 북부 전선에서는 피우수츠키가 투하쳅스키의 재편성을 허용하지 않았고, 투하쳅스키는 폴란드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다시 쫓겨나야 했다.

전쟁의 종결과 그 역사적 의미

폴란드는 이전의 국경선을 회복했고, 리투아니아가 점령했던 빌뉴스(빌나)마저 되찾았다. 그러나 소련의 패배는 소련 내부에도 중대한 결과를 낳았다.

러시아 혁명 세력은 혁명이 총검만으로 수출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이후 소련은 혁명을 국외로 확산하는 것보다 국내에서 혁명의 성공을 확보하는 데 역량을 집중하게 되었다. 이렇듯 바르샤바 전투는 이후 20년간 유럽을 공산주의의 야망으로부터 지켜낸 방파제가 되었다.

전쟁은 휴전으로 마무리되었고, 1921년 3월 체결된 리가 조약을 통해 폴란드의 동부 국경이 최종 확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