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디엔비엔푸 요새의 설립과 프랑스군의 치명적 오판

디엔비엔푸 요새의 설립과 프랑스군의 치명적 오판

디엔비엔푸, 왜 하필 그곳이었는가

1953년 11월 20일 공수부대가 투하된 이후, 디엔비엔푸는 급속히 요새화된 거점으로 변모했고, 최대 12,000명의 전투 병력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로 성장했습니다. 그런데 프랑스군은 왜 하필 이런 곳을 선택했을까요? 이유는 단순했습니다. 프랑스 지휘부가 더 이상 참을성을 잃어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1946년 12월 19일부터 베트민 혁명군과 전쟁을 벌여온 프랑스로서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눈에 띄는 승리가 절실했습니다. 그래서 적 통제 지역 안으로 무려 300km 이상 깊숙이 들어간 디엔비엔푸 점령을 결심하게 된 것입니다.

요새의 역할을 두고 벌어진 혼란

흥미롭게도 사이공의 지휘부조차 디엔비엔푸가 어떤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지 명확한 방침을 세우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라이차우(Lai Chau) 수비대의 철수 집결지인가? 필수적인 전략 요충지를 지키는 '고슴도치 진지'인가? 코니(Cogny) 장군이 주장하듯 공세의 출발점인가? 아니면 지압(Giap) 장군의 부대를 유인하기 위한 함정인가? 혹은 홍강 삼각주 공세에 앞서 적 병력을 붙잡아 두는 '고정 농양' 역할인지, 의견은 분분했습니다.

나바르(Navarre) 장군이 사령관직을 맡기 전, 프랑스 인도차이나 원정군 총사령관이었던 살랑(Salan) 장군은 "라오스는 디엔비엔푸, 나산(Na San), 라이차우 중 하나를 반드시 확보해야만 방어할 수 있다"고 선언한 바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바르는 계곡 바닥에 자리한 디엔비엔푸를 요새화하기로 선택한 것에 대해 그를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낙관론에 젖은 프랑스 지휘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바르는 폭 16km, 길이 9km에 달하는 이 분지를 작전을 펼치기에 이상적인 기지로 여겼습니다. 그는 적이 디엔비엔푸의 방어 시설을 포위 공격하거나, 16km 밖 인근 언덕에서 포격으로 활주로를 파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습니다.

한때 디엔비엔푸는 프랑스와 외국의 정·군계 인사들이 찾는 일종의 '관광 명소'처럼 되기도 했습니다. 사방에서 이 견고진(堅固陣)에 대한 찬사만 쏟아졌습니다. 그러나 단 한 사람, 블랑(Blanc) 장군만은 몬순 기간 동안 이 진지의 실효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안타깝게도 그의 충고는 묵살되었습니다.

방문자 가운데는 영국 무관인 스피어스(Spears) 장군, 고등판무관 말콤 맥도날드(Malcolm McDonald), 그리고 태평양 지역 미국 지상군 사령관 존 오다니얼(John O'Daniel) 장군을 비롯한 여러 미국 장성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유능한 인사들 중 누구도 디엔비엔푸가 적의 공격을 격퇴할 능력이 있다는 판단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프랑스 군 수뇌부는 사실상 전면적인 실명 상태에 빠져 있었습니다. 정작 그들은 적군의 움직임과 가능성을 충분히 알 수 있는 입장이었음에도 말입니다.

지압의 대응과 프랑스군의 작전

결국 나바르는 이 시스템을 구축해 놓았고, 지압은 그것을 역이용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베트민 전쟁 평의회는 11월 20일 프랑스군의 공수 작전이 만들어낸 디엔비엔푸의 상황을 면밀히 분석했습니다. 그리고 제316사단에 라이차우를 공격해 그곳 수비대를 요새로 철수시키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같은 해 12월, 프랑스 지휘부는 베트민의 계획을 미리 간파합니다. 라이차우 주둔군은 베트민군이 도착하기 사흘 전, 무려 183회의 항공 회전을 통해 공중 철수에 성공했습니다. 한편 디엔비엔푸에서는 코니 장군이 명령한 공격 행동과 정찰 임무가 값비싼 대가를 치르기 시작했습니다. 랭글레(Langlais) 중령의 지휘 아래 공수부대가 '아르데슈(Ardèche)'와 '레가트(Régate)'라는 암호명의 두 차례 작전을 수행했습니다.

공수부대는 기지를 떠나 라오스의 라오 경보병과 모로코 타보르(Tabor) 부대와 합류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만남의 지점은 짙은 정글로 덮인 산악 지대 소프나오(Sop Nao) 일대로 정해졌는데, 이곳은 매복하기에 더없이 좋은 지형이었습니다. 매우 기동성 높은 적에게 끊임없이 괴롭힘당한 이 부대는 막대한 손실을 입었고, 결국 원거리 기습 작전은 곧 중단되었습니다. 이후 노력은 디엔비엔푸 자체를 둘러싼 언덕들에 집중됩니다.

물류 전쟁: 승패를 가른 보급선

베트민 사단들이 디엔비엔푸를 향해 이동하기 시작하자, 지압은 신속히 병력을 동원했고 프랑스 수비대는 포위전에 대비했습니다. 공병 전문가들은 진지 구축에 필요한 물자를 36,000톤으로 추산했습니다. 이를 감당하려면 하노이발 다코타(Dakota) 수송기 12,000회 비행이 필요했지만, 이는 감당할 수 없는 규모였습니다. 결국 확보한 물자는 겨우 4,000톤, 그마저 75%가 철조망이었습니다!

사실 프랑스와 베트민 간의 이 전투는 무엇보다도 물류 전쟁이었습니다. 그리고 프랑스 지휘부는 이 전쟁에서 패배하게 됩니다. 베트민은 주변 고지에서 프랑스 진지 구축 작업을 선명하게 내려다볼 수 있었기에, 모든 방어 공사를 꼼꼼히 지도로 작성했습니다. 민낯으로 드러난 지면 위에서 가장 작은 참호 하나까지 또렷하게 드러났습니다. 반면 기지의 수비자들은 너무나 울창한 정글 때문에 적의 움직임을 전혀 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55,000명의 베트민 정규군과 지원병이 에워싸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습니다.

지압의 부대는 정글을 가르며 디엔비엔푸로 향하는 다섯 개의 도로를 개척했습니다. 밤마다 600대의 2.5톤급 소련제 트럭이 모든 등화를 끈 채 이 도로들을 오갔습니다. 물론 프랑스군의 룽로(Lung Lo) 고개와 파딘(Phadin) 고개에 대한 공습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긴 했습니다. 그러나 교통망이 오랫동안 끊긴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수천 명의 인부들이 밤낮없이 일하며 보급로를 정비했습니다. 게다가 보급로 위로는 짐꾼들과 노새, 그리고 한 대당 100kg씩 실은 자전거 부대가 전장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이 인간 개미들의 행렬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반면 요새 진지는 오직 항공 수송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모든 것이 하노이에서 와야 했습니다.

M24 채피(Chaffee) 전차 10대는 분해되어 운송되었는데, 전차 한 대를 운반하는 데 C47 수송기 5대와 브리스톨(Bristol) 수송기 2대가 필요했습니다. 여기에 105mm와 155mm 포, 11,000명분의 식량, 발전기, 정수 장치까지… 그러나 미국이 제공한 C119 수송기의 지원까지 받은 공군조차 이 모든 수요를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지압의 포병 화력

디엔비엔푸 주변에 배치된 지압의 포병 화력은 압도적이었습니다. 공격 전날 기준으로 포위군은 144문의 야포(미제 75mm 및 105mm), 48문의 120mm 중박격포, 30문의 75mm 무반동포, 그리고 37mm 대공포 36문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전투 중에는 6연장 카츄샤 로켓포 12문이 추가로 투입됩니다. 젖고 미끄러운 비탈길을 따라 이 거대한 기계들을 진지까지 끌어올리는 육체적 노력은 상상을 초월했을 것입니다.

D-데이 당일 지압은 포위된 측이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방대한 포탄 비축량을 확보하고 있었습니다. 1954년 3월 13일부터 5월 8일까지 그의 포병은 약 150,000발을 발사했으며, 그중 30,000발이 105mm급 포탄이었습니다.

반면 프랑스 포병은 부대에 탄약을 보급하기 위해 상상하기 어려운 규모의 공중 보급이 필요했습니다. 결국 기지에 투하된 포탄은 총 105mm 포탄 95,000발과 155mm 포탄 8,500발에 달했습니다. 그러나 그중 상당수는 점점 좁아져 가던 진지 경계선 바깥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요새 내부의 프랑스군은 105mm 포 6개 포대(24문), 155mm 곡사포 1개 포대, 그리고 120mm 중박격포 32문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피로 대령의 오만한 확신

포병 사령관 피로(Piroth) 대령은 이 정도 전력이면 적 보병의 어떤 공격도 저지하고 효과적인 대포병 사격을 가할 수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단언했습니다. "베트민의 어떤 포도 세 발 이상 발사하지 못하고 파괴될 것이다."

그러나 적 포병의 화력, 풍부한 탄약, 포수들의 숙련도, 그리고 위장술의 효율성은 완전히 과소평가되고 있었습니다.

모든 예상을 깨고, 베트민의 포들은 중국 남부의 캠프에서 훈련받은 우수한 포병 분대들이 운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포격은 활주로와 방호되지 않은 프랑스 포병 진지를 한눈에 내려다보는 관측병들에 의해 지휘·통제되었습니다. 공격 첫날부터 그들의 화력과 정확성은 포위된 프랑스군에게 충격을 안겼고, 프랑스군의 대포병 사격은 무질서하고 아무런 효과도 거두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베트민의 105mm 포들이 위치 파악이 사실상 불가능하고 거의 무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포좌(砲座) 깊숙이 잘 묻혀 있었는데, 이는 사거리를 제한하고 운용을 어렵게 만드는 대신 생존성을 크게 높였습니다. 여기에 더해, 적은 가짜 포를 설치해 관측병들을 수시로 현혹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