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디엔비엔푸의 서막, 프랑스 공수부대의 '비버 작전'

디엔비엔푸의 서막, 프랑스 공수부대의  비버 작전

1953년 11월, 인도차이나 전쟁의 향방을 가를 운명적 작전이 시작되었다. 프랑스군은 통킹(Tonkin) 북서부, 라오스 국경 근처의 디엔비엔푸(Dien Bien Phu) 계곡에 대규모 공수 부대를 투하해 비엣민의 보급망을 차단하고 결전의 발판을 마련하고자 했다. 이 작전의 코드명은 '카스토르(Castor)', 프랑스어로 '비버'를 뜻하는 말이다.

긴장감이 감도는 새벽의 비행장

통킹 하노이 바로 인근에 있는 지아람(Gia-Lâm)과 박마이(Bac-Mai) 비행장에는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다. 1,800여 명의 프랑스군과 베트남군 병사들이 완전무장한 채 팽팽하게 긴장한 신경으로 출격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을 이끄는 것은 비가르(Bigeard) 소령, 브레시냐크(Bréchignac) 소령, 수케(Souquet) 소령이라는 세 명의 지휘관. 세 사람 모두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수많은 전투를 치러 온 노련한 베테랑들이었다.

출발 지역에는 C-47 다코타 수송기 67대가 일렬로 늘어서 있었고, 승무원들은 이륙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1953년 11월 20일, 역사적인 아침이었다.

'카스토르 작전'의 개시

약 300km 떨어진 상공에서는 또 다른 다코타 한 대가 옅은 비와 함께 안개에 잠긴 계곡 위를 선회하고 있었다. 기내에는 보데(Bodet), 데쇼(Décheaux), 질(Gilles) 세 장군이 탑승해 있었다. 그들은 곧 비엣민이 장악한 작은 마을에 투하되기를 기다리는 공수 3개 대대에 출발 명령을 내릴 예정이었다. 그 마을의 이름이 바로 디엔비엔푸였다.

그러던 갑자기 오전 7시, 하늘이 개이기 시작했다. 공수부대에 탑승 명령이 하달되었고, '카스토르 작전'이 마침내 막을 올렸다.

디엔비엔푸 상공에 피어난 낙하산

이윽고 디엔비엔푸 상공에는 다코타 편대의 굉음이 하늘을 가득 채웠고, 수천 명의 타이족 농민들은 경악한 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수송기들이 병력 투하를 시작했고, 수백 개의 흰 낙하산이 푸른 하늘에 꽃처럼 활짝 피어올랐다. 비엣민 병사들은 황급히 전투 위치로 달려갔다.

투하지구(D.Z.) '나타샤(Natasha)'에서는 훈련 중이던 비엣민 중대 하나가 비가르 소령의 제6식민지낙하산대대 병력들과 즉시 교전을 벌였다. 문제는 투하지구가 지나치게 넓다는 것이었다. 투하된 수많은 물자를 회수하는 일조차 만만치 않았다. 기관총, 81mm 박격포, 무전기들이 지상 곳곳에 흩어져 있었고, 무전기 상당수는 착지 시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파손되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일부 박격포를 끝내 찾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남쪽 투하지구의 혼란과 비가르의 결단

남쪽 투하지구 '시몬(Simone)'의 상황은 더욱 험난했다. 브레시냐크 소령이 지휘하는 제2공수엽병연대 제2대대 병력들은 열악한 조건 속에 투하되어 부대 단위로 재집결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증원을 기다리지 않은 비가르 소령은 4개 중대 중 3개 중대를 이끌고 자신의 투하지구를 벗어나, 정규 비엣민 부대가 완강히 저항하는 디엔비엔푸 마을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마을 점령과 적은 손실

오후 3시, 비가르의 증원으로 투하된 수케 소령의 제1식민지낙하산대대가 도착하여 소탕 작전에 합류했다. 비엣민 제148연대는 질서정연하게 후퇴했고, 마을 주민들은 산속으로 피신하였다. 이날 프랑스군의 손실은 전사 13명, 부상 40명에 불과했다. 잘 훈련된 공수부대가 감행하는 기습 작전이 얼마나 강력한 효과를 지니는지를 보여준 결과였다.

두 번째 투하와 진지 구축

작전 이틀째인 11월 21일, 두 번째 공수 부대가 디엔비엔푸 분지에 투하되었다. 제1외인낙하산대대 소속 외인부대원들과 제8베트남낙하산대대 병력들이었다. 이들을 이끈 것은 착지 순간 다리 골절상을 입은 랭글레(Langlais) 중령과, 작전 전체를 총지휘한 질(Gilles) 장군이었다.

이제 중요한 군수 물자들이 투하지구 '옥타비(Octavie)'에 투하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파견된 불도저 한 대는 지면에 닿는 순간 파손되고 말았다. 11월 22일, 신규 베트남 병력 1개 대대가 도착하면서 프랑스 수비대의 병력은 4,560명에 이르렀다. 이제 본격적으로 진지 방어 공사를 조직할 때가 된 것이다. 그러나 당시 아무도 알지 못했다. 이 계곡에서 시작된 교착이 몇 달 뒤 프랑스 극동 원정군의 운명을 결정짓는 거대한 참화로 번질 것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