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준비되지 않은 채 찾아온 종전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가, 8월 9일 나가사키가 미국의 최초의 원자폭탄으로 파괴되었다. 그러나 프랑스는 인도차이나 정책을 정립하고 이에 대비할 시간조차 갖지 못한 상태였다. 고등판무관이 임명된 것은 사태의 압박 속에서, 일본 항복 사흘 뒤인 8월 17일에야 이루어졌으며, 그 자리에는 다르장리외(D'Argenlieu) 제독이 선임되었다.
따라서 본국이 권고한 대로 '가장 급한 일부터 준비하는' 책임은 이미 현지에 있던 프랑스 인원들, 즉 칼커타와 쿤밍(Kunming)에 있던 이들에게 떨어졌다. 그러나 7월, 프랑스가 협의조차 받지 못한 채 소외된 포츠담 회담에서 하나의 결정이 채택되었고, 그 결과는 인도차이나에 치명적인 재앙으로 작용하게 된다.
북위 16도선: 중국 세력권으로 편입된 통킹
일본군 부대의 항복 접수를 연합국 간에 분담한다는 명분 아래, 마운트배튼(Mountbatten) 제독의 동남아시아사령부(SEAC)는 북위 16도선 이남의 인도차이나 영토를 담당했고, 그 이북은 '중국' 전구 사령관의 관할 아래 놓였다.
다시 말해 통킹(Tonkin), 라오스 대부분, 안남 북부는 '중국 세력권'으로 되돌아간 것이다. 장제스는 루스벨트로부터 받았던 약속이 실현되는 것을 지켜보았다. '우호적인' 중국군은 패전한 일본군의 무장 해제를 구실로 인도차이나 북부에 진입했다. 이로써 인도차이나는 한 가지 재앙이 아니라 두 가지 재앙을 함께 겪게 된다.
유일하게 준비된 세력, 베트민
이 모든 혼란 속에서 오직 베트민(Viet-Minh)만이 행동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8월 7일 게릴라 부대를 '베트남 해방군'으로 재편하고, '베트남 인민 해방 위원회'를 조직했으며, 10일에는 총봉기 명령을 하달했다. 치밀하게 갖춰진 모든 체제가 가동에 들어갔다. 호치민이 예언했듯이, 권력은 차지할 필요조차 없었다. '더 이상 권력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행정 기관에 대한 체계적 침투로 면밀히 준비된 이 작전은, 일본 참모본부 내 강경파 활동가들의 강력한 지원까지 받았다. 군대가 무력화된 그들은 '백인 제국주의'로부터 아시아를 해방하려는 정책을 계속 추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방금 항복한 일본이 인도차이나에서(인도네시아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진다) 개입과 선동의 수단을 온전히 보존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 시기의 가장 큰 역설이 아닐 수 없다. 패전국 일본은 자신에게 부여된 사명이, 그들의 사상과 실제 목표가 어떠하든 가장 유능함을 입증하는 세력에 의해 계속 수행되도록 했다. 헌병대(켐페이타이) 요원들의 교묘한 지원과 철저한 통제 아래, 베트민은 단 사흘 만에 상황의 주인이 되었다.
사흘 만에 완성된 권력 장악
8월 16일, 일본 참모본부는 총독부 각 부처에 '황실 대리인'의 업무 인수를 통보했다. 그러나 같은 날 베트남 정치범들을 석방했고, 17일에는 관료들의 시위에 힘입어 황실 문장을 걷어내고 황금별이 박힌 붉은 깃발을 게양했다.
18일에는 '황실 대리인'이 임시 관리 위원회에 권력을 넘겨야 했다. 19일, 일본으로부터 인도차이나 경비대의 무기를 넘겨받은 베트민은 도시의 완전한 주인이 되었다.
바오다이(Bao-Dai) 황제는 20일, 트루먼 대통령·영국 국왕·장제스 원수·드골 장군에게 호소하며 베트남의 독립 승인을 얻으려 했으나, 결국 퇴위를 결심한다. 25일 후에(Hue)에서 그는 해방 위원회 대표 두 사람에게 권력의 도구인 황실 인장을 넘겨주고 퇴위 조서에 서명했으며, 그 순간 베트민의 붉은 깃발이 옛 황도 위에 휘날렸다.
모든 일이 너무나 빠르고 완벽하게 진행되어, 주민들은 단 며칠, 아니 몇 시간 만에 자신들이 베트민 동맹의 통치 아래 들어갔다는 사실조차 자각하지 못했다.
무력하게 지켜보는 프랑스
한편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주재 대표들은 일본군의 포로가 되거나 무력화되어, 이 격변을 어쩔 수 없이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칼커타나 쿤밍 등 외부에 있던 이들—필자 자신을 포함하여—은 프랑스 공화국 임시정부(G.P.R.F.)의 이름으로 인도차이나에서 프랑스의 권리를 주장할 순간을 기다리며 노력을 배가했다. 일본 항복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인수 담당 행정관과 군인들이 칼커타에서 낙하산으로 투입되었지만, 다수가 베트남인들에게 포획되거나 학살당했다. 일부는 산악 게릴라 부대에서 살아남았으나, 실질적인 행동은 불가능했다.
쿤밍에서 필자는 중국-통킹 국경을 따라 배치된 모든 코만도 부대를 하노이로 투입하기로 결심했다. 최초의 부대인 블랑샤르(Blanchard) 중위의 코만도는 해군 초계정 두 척에 탑승해 15일 하이퐁(Haiphong)에 상륙했고, 프랑스 국기를 든 이 부대에 깊은 인상을 받은 주민들 사이에 큰 동요가 일었다. 그러나 며칠 뒤 블랑샤르와 그의 동료들은 일본군의 포로가 되고 만다.
필자 자신의 급거 하노이행 결정 역시 중국과 미국의 반대에 부딪혔다. 일주일 넘는 협상 끝에 겨우 8월 22일에야 비행기를 확보했지만, O.S.S.(미국 전략사무국) 장교들이 필자의 행보에 따라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