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산된 호치민 회담
호치민(Ho Chi Minh)은 나와의 회담을 거부하겠다는 뜻을 미국인들에게 밝혔고, 그들은 이 소식을 나에게 전해 주었다. 폭우라는 악천후와 세계 곳곳에서 급박하게 일어나는 정세 변화가 겹치면서 이 회담은 결국 무산되었다. 한편 파리는 더욱 시급하고 중대한 다른 문제들에 몰두한 나머지 베트민(Viet Minh)이 보낸 메시지에 답변하지 않았다. 물론 그 메시지는 분명히 전달되어 있었다.
파리 방문이 드러낸 프랑스의 준비 부족
나는 아시아에서 최종 공세가 임박했음을 감지하고, 인도차이나 문제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확정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여 파리를 서둘러 찾았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짧은 방문은 프랑스가 동남아시아에서 과거의 지위를 되찾기 위해 필요한 노력을 기울일 준비가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전혀 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다.
우리 개입 부대, 즉 극동 주둔 프랑스 원정군은 충분하고 강도 높은 훈련을 마친 상태였다. 그러나 연합국 측은 이 부대를 작전 지역으로 수송하는 데 필요한 선박을 제공하기를 거부했다.
베트남 국민당 지도자와의 면담
쿤밍(Kunming)으로 돌아온 뒤, 나는 베트민에 맞서고 있던 두 대표적 민족주의 정당 가운데 하나인 V.N.Q.D.D.(베트남 국민당, Việt Nam Quốc dân Đảng)의 지도자 응우옌 티엉 탐(Nguyễn Tường Tam)과 면담을 가졌다. 이 자리는 인도차이나에서 발판을 되찾기 위해 극복해야 할 난관에 대해 아무런 환상도 남기지 않았다. 싸우거나, 아니면 기존 지위를 근본적으로 재조정하거나, 양자택일이 불가피하다는 것이 명확했다. 그러나 직전에 파리에서 나눈 면담들은 우리가 어느 쪽 사태에도 대비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
너무 늦게 온 1945년 3월 24일 선언
프랑스 임시정부(G.P.R.F.)의 1945년 3월 24일 선언은 프랑스의 제국주의적 통치 관념에 커다란 전환을 예고한 것으로, 그 자체로는 관대하고 진보적인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 선언은 너무 늦게 나왔고, 일본의 쿠데타 이후 베트남인들이 이미 당연한 권리로 여기게 된 수준에는 한참 미치지 못했다.
드골의 구상, 빈송 왕자의 복위
그럼에도 샤를 드골(Charles de Gaulle) 장군은 하나의 구상을 품고 있었다. 바로 빈송 왕자(Prince Vĩnh San)를 왕좌에 다시 앉히는 것이었다. 빈송은 어린 나이에 '유딴(Duy Tân)'이라는 이름으로 통치한 바 있는 인물이었다. 1916년 프랑스 통치에 반대하는 음모에 가담한 혐의로 망명길에 올랐지만, 프랑스에 대한 충성을 끝내 저버리지 않은 이 전 황제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자유 프랑스군(Free French Forces)에 입대해 복무했다.

그의 프랑스에 대한 충성심과 자유주의적 성향은 그를 타협과 화해의 군주로 만들 수 있었다. 조국의 미래와 새로운 프랑스-베트남 관계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갈 수 있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운명이 바꾼 역사의 갈림길
빈송 왕자는 1945년 말 베트남으로 향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운명은 다른 결말을 내려놓았다. 오랫동안 살았던 레위니옹(Réunion) 섬에 먼저 들러 가족을 만나고자 했던 빈송은 중앙아프리카에서 비행기 추락 사고로 생을 마감했다.
이 사고는 1945년 12월 26일 프랑스령 적도 아프리카의 방기(Bangui) 인근에서 발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드골의 구상대로라면 그는 베트남 왕좌에 복위할 예정이었다. 만약 그가 무사히 귀환했다면, 이후 베트남과 프랑스의 역사는 지금과 전혀 다른 모습이 되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