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이퐁(Hải Phòng)은 여러 세기에 걸쳐 중요한 항구 도시로 번영해 왔으며, 통킹 지역의 주요 교역 중심지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프랑스인들은 이곳을 '통킹의 베네치아'라고 불렀고, 프랑스의 정복 이후 하이퐁은 인도차이나 전역에서 프랑스 해군의 최대 거점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당시 대표적인 호텔이었던 오텔 뒤 코메르스(Hôtel du Commerce)는 지금도 남아 있으며, 이 호텔이 위치했던 폴베르 거리(rue Paul-Bert)는 오늘날 '디엔비엔푸 거리'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또한 통킹 프랑스 보호령 말기의 대표 일간신문은 앙탕트(L'Entente)였습니다.
일본군의 점령과 베트남 독립 선언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이 인도차이나를 침공하자 하이퐁 역시 포격을 받은 뒤 일본 제국 육군에 점령되었습니다.
점령이 끝난 후인 1945년 9월 2일, 호치민은 하노이에서 베트남의 독립을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1946년 11월 23일, 프랑스 군함 세 척이 하이퐁을 포격하여 수천 명의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 사건은 이후 7년 반에 걸쳐 계속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의 서막을 여는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참전자 앙리 마르탱의 증언
당시 작전에 참여했던 앙리 마르탱(Henri Martin)은 다음과 같이 회고했습니다.
"1946년 11월 23일 오전 10시, 함포 사격이 시작되었다. 에밀 베르탱(Émile Bertin) 순양함은 홍강(Rouge 강) 하구에서 포격을 개시했고, 우리는 르 슈브뢰유(Le Chevreuil) 호와 함께 시내를 지나는 강 위에서 작전했다. 우리는 탑재한 500발의 포탄을 모두 소진한 뒤 재보급을 받아 또다시 500발을 발사했다. 바타(Battet) 제독은 시내 희생자 수를 6천 명으로 추산했으나, 포격이 집들이 빼곡히 들어선 안남인 구역에 집중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실제 사망자는 그보다 훨씬 많았을 가능성이 있다."
다만 실제 기록에 따르면 이 포격 작전에는 르 슈브뢰유 호를 포함한 통보함(avisos) 3척만 참여한 것으로 확인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