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인도차이나 전쟁과 프랑스 공수부대: 디엔비엔푸 참패로 이어진 길

디엔비엔푸: 프랑스 식민주의의 종소리

인도차이나에서 공수부대가 거둔 수많은 초기 성공은 1953년 프랑스군으로 하여금 큰 착각에 빠지게 만들었다. 베트민(Việt Minh)이 필요로 하는 전략적 요충지에 공중으로 '미끼'를 투하하면 적을 강제로 결전에 끌어낼 수 있고, 이후 소모전을 통해 완벽히 섬멸할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였다. 디엔비엔푸(Diên Biên Phủ) 전투는 프랑스 식민지 야망의 종소리를 울렸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 열강이 아시아에서 감당해야 했던 대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떠올리면 '참패'

만약 군사사를 단어 연상 게임처럼 가르친다면 어떻게 될까?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다음에 오는 첫 번째 이름은 단연 '디엔비엔푸'일 것이고, 곧이어 떠오르는 생각은 '참혹한 패배'일 것이다.

다행히 역사 교육이 그런 방식으로 이루어지지는 않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인도차이나에서 벌어진 프랑스군의 작전, 특히 공수 작전이 일련의 우스운 실수에 불과했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실상은 훨씬 복잡했다. 초기 공수 작전들은 놀라울 정도로 성공적이었고, 문제는 그 성공이 낳은 과신이었다.

전쟁의 발단: 1946년, 박닌의 함성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1946년에 시작되었다. 베트남 민족주의 지도자 호치민(Hồ Chí Minh)과 프랑스 간의 1년에 걸친 협상이 결렬된 직후, 같은 해 8월 박닌(Bắc Ninh)에서 프랑스 호송대가 매복 공격을 받아 궤멸적인 피해를 입으면서 전쟁의 막이 올랐다.

당시 호치민의 군사적 오른팔이었던 보응우옌잡(Võ Nguyên Giáp) 장군은 약 5만 명의 병력을 지휘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무장은 일본제, 미국제, 프랑스제 무기가 뒤섞인 이질적인 것이었고, 규격화된 군대라고 부르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고립된 베트민, 그리고 아이러니한 역사

흥미로운 점은 이 시기 베트민이 아직 공산 진영의 지원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중국은 국공내전의 늪에서 아직 빠져나오지 못한 상태였고, 소련의 손길도 닿지 않았다. 즉, 잡 장군의 병력은 사실상 고립된 채 싸워야 했다.

또 하나 기억할 만한 사실이 있다. 베트민이 1941년부터 일본 점령군에 맞서 게릴라전을 벌여왔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당시 베트민은 미국으로부터 지원을 받았다.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에 맞서 함께 싸웠던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과 대립하게 될 운명이었던 두 세력이, 한때는 같은 적을 상대로 손을 잡았던 셈이다.

이러한 출발점은 이후 8년간 이어질 처절한 전쟁, 그리고 디엔비엔푸의 비극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초반의 성공에 취한 프랑스와, 고립 속에서도 조직력을 키워간 베트민. 두 세력의 역학 관계가 뒤집히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