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루이 10세 르 위탱(Louis X le Hutin), '분쟁왕'
루이 10세 르 위탱(1289년 파리 출생 ~ 1316년 방센 사망)은 1314년부터 1316년까지 프랑스를 다스린 국왕으로, 필리프 4세 르 벨(Philippe IV le Bel)의 아들이며 카페 왕조 직계의 마지막 군주 가운데 한 사람이다. '르 위탱(Le Hutin)'이라는 별칭은 '분쟁을 일으키는 자', 즉 분쟁왕(The Quarreler)이라는 뜻에서 비롯되었다.
봉건 귀족의 압박과 흔들린 왕권
루이 10세의 통치는 정치·경제 등 모든 분야에서 카페 왕조의 쇠퇴를 예고하는 전조였다. 그는 1305년 어머니로부터 나바라 왕위를 물려받았고, 1314년 아버지 필리프 4세가 서거하자 프랑스 왕위를 계승했다. 그러나 즉위와 동시에 숙부인 샤를 드 발루아(Charles de Valois)가 이끄는 봉건 영주들의 기세에 눌려 왕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했다.
샤를 드 발루아는 아버지 필리프 4세의 최측근 참모였던 앙게랑 드 마리니(Enguerrand de Marigny)에 대한 복수를 맹세한 인물이었다. 결국 루이 10세는 영주들의 요구를 들어주기 위해 1315년 아버지의 충신이었던 마리니를 처형했다. 여기에 재정난에 시달리던 그는 롬바르디아 은행가들과 유대인 상인들의 재산을 강탈하는 수단을 택했고, 이로써 왕정의 명분과 권위를 스스로 훼손하며 체제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렸다.
투르 드 넬 스캔들과 불행한 결혼 생활
그의 사생활 역시 공적인 삶만큼이나 소란스러웠다. 왕비 부르고뉴의 마르그리트(Marguerite de Bourgogne)는 1314년 '투르 드 넬 사건'으로 불리는 오네(d'Aulnay) 형제와의 추문에 연루되어 왕비의 지위를 잃었다. 그녀는 같은 해 폐위되어 유폐되었으며, 이듬해인 1315년에는 감옥에서 목졸려 살해되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이후 루이 10세는 헝가리의 클레망스(Clémence de Hongrie)와 재혼했다. 그러나 1316년 국왕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면서 클레망스는 유복자로 아들을 낳았다. 안타깝게도 장 1세(Jean Ier)는 태어난 지 겨우 나흘 만에 요절했고, 왕위는 숙부인 필리프 5세 를 롱(Philippe V le Long)에게 돌아갔다. 일각에서는 이 어린 왕의 죽음을 앞당긴 배후로 필리프 5세를 의심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