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유럽의 웃음거리에서 초강력 무기로… '신 스파르타' 프로이센의 신형 기병대

유럽의 웃음거리에서 초강력 무기로…  신 스파르타  프로이센의 신형 기병대

낡은 전술에 갇힌 프로이센 기병

18세기 초부터 약 1742년까지 프로이센 기병대는 시대에 뒤떨어진 전술을 고수했다. 프로이센 기병들은 대열의 응집력을 최대한 유지하기 위해 적에게 아주 천천히 접근했고, 돌격 직전에는 여러 차례 멈춰 서곤 했다. 적 기병의 공격을 받으면 역돌격을 감행하기보다는 제자리에 버티며 화망으로 막아내기를 기다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듯, 이런 방식은 기병이 지닌 가장 큰 무기인 충격력을 스스로 포기하는 길이었다. 적 보병을 상대할 때조차 느리게 전진하며 산발적인 교전만 벌이다가, 약 60보, 즉 45미터 거리에 들어서야 비로소 돌격을 개시했다. 이 정도 거리에서는 말이 접촉 순간 최고 속도를 낼 시간이 없었던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느린 전진은 적 보병에게 대응을 준비할 충분한 시간을 주어, 기병 돌격이 지닌 심리적 효과마저 무력화시켰다. 프로이센 기병이 부끄럽게도 와해되어 도주한 몰비츠(Mollwitz) 전투의 냉철한 반성 끝에, 프리드리히 대왕은 기병 전투력을 끌어올리는 집중적인 개혁 프로그램을 추진했다. 그 결과 '고풍스러운' 프로이센 기병대는 유럽에서 가장 완벽한 기병 군단, 곧 치명적인 전쟁 기계로 탈바꿈했다.

6,000기가 하나의 벽처럼

프로이센 기병들의 훈련 수준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 있다. 훈련 중 무려 40개 기병 중대가 중대 간 간격 없이, 대열의 응집력을 잃지 않은 채 전속 질주(갤럽)로 전진한 것이다. 6,000명의 기병이 끊김 없는 하나의 견고한 벽처럼 고속으로 진격하는 광경만으로도 구경꾼들에게 경외심을 불러일 일이었다. 프리드리히 역시 그 찬탄을 숨기지 않았다.

기병 작전의 성패는 이를 수행하는 부대의 속도, 운동량, 응집력과 직결되었다. 기병전의 승리는 심리적 효과, 즉 적에게 불러일으키는 공포에 달려 있었다. 대개 양측 중 한쪽은 접촉 직전 혹은 직후에 도주하기 마련이었다.

전사자의 압도적 다수는 추격 단계에서 승자가 패자에게 입힌 것이었다. 따라서 기병 부대의 응집력과 성공적인 전투 후 신속히 재편성하는 능력은 그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였다. 프로이센 기병이 성공한 비결은 개개인이 일대일 결투에서 상대를 이길 수 있는 개인적 무용이 아니었다. 결과를 결정한 것은 집단 행동이었고, 무엇보다 공격 실행의 속도가 승자를 가렸다.

교리의 핵심은 단 두 단어, '신속 돌격'

프로이센의 기병 운용 전술 교리는 단 두 단어로 요약된다. 바로 '신속 돌격(rapid charge)'이다. 기병전은 결코 개별 결투의 집합이 되어서는 안 되었다. 그런 전투에서는 "장교는 평병보다 더 가치 있을 것이 없다"고 여겨졌다. 적으로부터 먼 거리에서 시작되는 항상 빠른 갤럽 돌격 덕분에 프로이센 병사들은 적에게 명확한 전술적 우위를 점했고, 자신들의 사기 또한 크게 북돋아졌다.

반면 적군의 사기는 현저히 떨어졌다. 프리드리히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중대들에게 전속 갤럽으로 공격하라고 명령한다. 공포는 겁 많은 자조 나머지 병사들과 함께 움직이게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주저하면 다른 병사들에게 짓밟힐 것임을 안다. 내 의도는 부대들이 접촉하기도 전에 공격의 속도로 적을 분쇄하는 것이다. 백병전이 벌어지는 동안에는 장교든 평병이든 가치의 차이가 없으며, 부대의 질서와 응집력은 무너지고 만다."

프리드리히 대왕의 이 말은 새로운 정규 교리를 그 자체로 생생하게 설명해 준다. 탁월한 훈련 덕분에 프로이센 기병들은 놀라운 공격 속도를 달성할 수 있었다. 1748년까지 전진은 적으로부터 700미터 거리에서 시작되었다. 이 중 300미터는 속보(트로트), 400미터는 갤럽으로 달렸다. 2년 뒤 돌격 개시 거리는 1,200미터(속보 300미터, 캔터 400미터, 마지막 500미터 전력 질주)로 늘어났고, 1755년에는 무려 1,800미터에까지 도달했다!

교리의 실전 적용

이런 상황에서 적이 승리하거나 죽음을 받아들일 시간은 불과 몇 초에 불과했다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비교하자면 오스트리아 기병들은 접촉 직전 마지막 30미터 구간에서야 전속으로 질주했다. 다만 응집력을 온전히 유지하고 있는 보병 대열에 대한 공격은 대개 자제했다.

그러나 적 진영에 아주 사소한 흐트러짐이라도 발견되는 순간, 기병들은 그 틈을 파고들기 위해 돌진했다. 호엔프리트베르크(Hohenfriedberg, 1745) 전투에서 제5 프로이센 용기병 연대가 오스트리아 진선의 빈틈을 발견한 것이 바로 그 사례다. 이들은 적이 틈을 메우지 못하도록 즉각 신속하게 공격에 나섰다.

그 결과는 오스트리아군에게 참담한 것이었다. 오스트리아군 20개 대대가 프로이센 기병의 진격에 휩쓸려 수천 명이 죽거나 다쳤고, 상당수는 공황 속에 동료들에게 짓밟혔다. 게다가 2,500명이 포로로 잡혔다. 단 하나의 기병 연대에 의해서!

승리를 확실하게 만든 두 가지 요소

프로이센 기병의 성공 가능성을 극도로 높인 요인이 두 가지 더 있었다. 하나는 기병의 '파랑크스(밀집 방진)'형 대형 활용이었고, 다른 하나는 등자 끈을 짧게 사용한 것이었다. 깊은 종심의 대형은 이미 30년 전쟁(1618~1648) 무렵부터 기병 교범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보병 대열이 30열에서 10열, 그리고 3열로 얇아지듯, 기병 대형의 종심도 10열에서 3열, 때로는 2열로 얕아졌다. 파랑크스 대형, 즉 사실상 6열 깊이의 이중 대형 돌격은 조직적으로 수행되어, 깊은 종심이 최전열의 손실을 보충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호엔프리트베르크에서 제5 용기병 연대가 보여준 유명한 돌격은 바로 파랑크스 대형으로 실행되었다. 또 다른 사례에서는 용기병 5개 중대가 선형 대형의 경기병(후사르) 10개 중대, 곧 좌우에 각 5개씩 배치된 병력의 지원을 받아 파랑크스 대형으로 돌격하기도 했다.

최근까지만 해도 프랑스 혁명기와 나폴레옹 시대 프랑스 장군들의 발명품으로 여겨졌던 이 하이브리드 '혼합 대열' 기병 대형은 사실 순수하게 프로이센식 발상이자 응용이었다. 이 공격 모델은 프로이센군이 수많은 전투에서 활용했다.

특히 1758년 초른도프(Zorndorf) 전투에서는 당대 유럽 최고의 기병 지휘관인 폰 자이들리츠(von Seidlitz) 장군이 러시아 보병의 '방진(square)'을 상대로 이 대형을 광범위하게 활용했다. 한편 짧은 등자 끈은 기수가 안장 위에 일어설 수 있게 해주어, 적에게 강력한 분쇄 타격을 가하는 데 특히 큰 도움이 되었다.

유럽의 웃음거리에서 초강력 무기로…  신 스파르타  프로이센의 신형 기병대

오스트리아군을 분쇄하는 프로이센 용기병 연대.


유럽의 웃음거리에서 초강력 무기로…  신 스파르타  프로이센의 신형 기병대

적에게서 빼앗은 군기를 프리드리히 대왕에게 바치는 제5 연대 프로이센 용기병.


유럽의 웃음거리에서 초강력 무기로…  신 스파르타  프로이센의 신형 기병대

돌격에 나선 프로이센 키라시어(중장갑 기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