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그들의 허락' 아래에서만? 베를린 봉쇄 위기와 서베를린 시민의 선택

 그들의 허락  아래에서만? 베를린 봉쇄 위기와 서베를린 시민의 선택

통화 개혁을 둘러싼 위기의 발단

독일 경제 회복을 위해서는 안정적인 화폐가 무엇보다 필요했다. 1947년 겨울부터 1948년에 걸쳐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등 4대 강국은 독일에 새로운 통화를 도입하는 방안을 논의했지만, 협상은 결국 아무런 성과 없이 끝났다. 이에 미국과 영국은 자신들이 점령한 지역에서 단독으로 통화 개혁을 단행하기로 결정하고, 프랑스가 이에 동조해 주기를 바랐다. 프랑스는 실제로 그 뜻에 따랐다.

최종 결정은 오직 서방 3개국만 참석한 가운데 열린 런던 회의에서 내려졌다.

연합 관리 이사회의 붕괴와 첫 충돌

1948년 6월, 연합 관리 이사회(Allied Control Council)의 소련 대표들은 회의 심의 내용에 대한 전체 보고서를 요구했다. 서방 측이 이를 거부하자 소련 대표단 전원이 이사회를 퇴장했고, 대표단을 이끌던 소콜로프스키(Sokolovsky) 원수는 이사회가 더 이상 기능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며칠 뒤, 서베를린으로 향하던 첫 열차들이 소련군에 의해 저지되어 되돌려졌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사건' 수준에 불과했다. 봉쇄가 아니라 단순한 검문소 설치였던 것이다. 과연 모스크바는 서방 세력을 베를린에서 몰아내려는 것이었을까, 아니면 베를린을 서방에 대한 압박 수단으로 활용하려는 데 그칠 생각이었을까?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간 긴장

처음에 소련은 방해 공작 수준에서 움직였을 가능성이 크다. 호전적인 기색은 있었지만 그 이상은 아니었다. 반면 서방의 대응은 혼란스럽고 우유부단했다. 이 단계에서만큼은 봉쇄가 미완의 상태에 머물 수 있었고, 위기는 여전히 피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 사이 소련은 입장을 바꾼 듯싶었다. 서베를린으로의 접근이 다시 차단되자, 서방은 공중 수송으로 맞섰다. 위기는 한 단계씩 격화되었고, 양측 모두 자신이 결정적 대결에 휘말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에스컬레이션이 가능했을 뿐 아니라, 완전한 봉쇄가 현실이 된 것이다.

'허락'을 보여주려던 소련의 의도

소련 당국과 동독 지역의 공산당 지도부가 서방 군대를 베를린에서 몰아내려 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적어도 서베를린 주민들에게 이렇게 각인시키려 했다. 즉, 서방은 '그들의 허락'이 있어야만 이 도시에 남아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를 위해 소련은 정치적 압박과 물질적 혜택을 동원해 주민들을 회유하려 했다. 한편으로는 주민들이 선출한 대표들을 협박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동베를린에 등록하는 서베를린 주민에게 식량과 연료를 넉넉히 배급하겠다고 제안했다.

혹한을 견딘 서베를린 시민의 용기

여기서 우리는 서베를린 시민들의 용기에 경의를 표해야 한다. 한겨울, 아직 폐허 그대로인 도시, 노인과 아동의 비율이 비정상적으로 높았던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등록에 응한 인구는 불과 2%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