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식적으로는 없었던 전쟁
공식적으로 베트남에는 '전쟁'이 없었다. 그러나 수많은 평화 협상 시도에도 불구하고, 1954년부터 1975년까지 베트남을 유린한 길고 피비린내 나는 일련의 교전, 습격, 매복, 게릴라전, 그리고 마침내 벌어진 대규모 전투를 막을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처럼 이례적인 '전쟁'의 조건은 정치 영역에만 머물지 않았다. 전략과 전술마저 송두리째 뒤흔들었다. 1960년대 베트남에서는 전함이 다시 등장했고, 이미 잊혀졌다고 여겨졌던 스카이레이더(A-1)나 불굴의 명기 다코타(C-47) 같은 구형 항공기들이 새로운 역할을 찾아 전장에 복귀했다.
동시에 초현대적 기술들이 실험되면서 공중전은 때로 전례 없는 강도에 이르렀다. 흥미롭게도 남베트남의 붕괴는 미국 지도부가 과도한 개입을 자제하려 했던 정치적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 패배는 군사적으로는 터무니없는 결과였다. 사이곤과 동맹군은 단 한 순간도 하늘에 대한 제공권을 상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쩌면 그들은 하늘이 아니라 '인심'을 잃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분단의 시작: 제네바 회담과 디엔비엔푸
한국전쟁이 끝난 지 채 1년이 되지 않아 열린 제네바 회담(1954)은 베트남을 북과 남 두 지역으로 분단하기로 결정했다. 양측의 첨예한 대립은 헤아릴 수 없이 길고 고통스러운 갈등, 이른바 '베트남 전쟁(1954~1975)'으로 이어졌다.
캄보디아, 라오스와 함께 베트남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구성하고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는 보 응우옌 지아프(Giap) 장군의 병력을 과소평가한 대가로 디엔비엔푸에서 뼈아픈 참패를 겪은 직후였다. 살랑(Salan) 장군은 "북베트남 보병은 세계 최강이다"라고 평가할 만큼 충격이 컸다.
이 패배 자체는 돌이킬 수 없는 결정타는 아니었지만, 공산 진영의 선전 선동에 적극 활용되었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이 분쟁을 종식시키고자 했던 프랑스 여론이 여기에 더해졌다. 결국 프랑스는 제17선을 경계로 남북으로 갈라진 채 베트남을 급히 떠났다.
베트콩의 등장과 게릴라전
그러나 북베트남은 공산 진영에 유리한 방향으로 국가를 재통일할 준비를 진행하고 있었다. 지아프는 게릴라 부대인 '베트콩(Viet Cong)'을 조직했고, 총력전의 위협 없이 게릴라가 주도권을 잡으면서 침투와 게릴라 활동은 극히 자연스러운 공세 수단으로 자리 잡았다.
사실 공산주의 세력은 자신들이 공세적 세력임을 한 번도 숨긴 적이 없었다. 역사적으로 수많은 공산당이 권력 장악을 위해 게릴라전을 채택해 왔다. 그리고 베트남은 이러한 활동에 최적의 환경이었다. 드넓은 논, 험준한 산악 지대, 극도로 울창한 정글, 고온다습한 기후, 그리고 빈약한 기반 시설까지.
반대로 말하면, 이 나라는 어떤 형태의 게릴라전에도 완벽하게 부합하는 땅이었다. 밤에는 무장 전투원이던 자들이 낮이 되면 평화로운 농부로 돌아가는 식이었다. 문제는 서구 지도자들이 1957년 베트콩의 초기 작전에 별다른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더 심각한 것은 응오 딘 디엠(Diem) 대통령의 정부군이 이에 어떻게 대응하느냐는 과제였다.
미국의 개입과 반게릴라 항공기의 탄생
1960년, 악화된 군사 상황을 감당하지 못하게 된 디엠은 미국에 지원을 요청했다. 이에 미 육군 특전부대인 그린베레(Green Beret) 부대가 베트남에 파견되었고, 미 공군은 대게릴라 전술 개발을 위해 플로리다주 에글린 공군기지에 특수항공전센터(Special Air Warfare Center)를 설치했다.
미 육군은 이러한 임무에 특화된 항공기의 요구 성능을 정의했는데, 이것이 바로 LARA/COIN(Light Armed Reconnaissance Aircraft / Counter Insurgency, 경무장 정찰기 / 반게릴라전기) 구상이었다. 핵심 요구 사항은 짧은 이륙 거리, 중무장 탑재 능력, 그리고 부상자 후송 능력이었다.
이렇게 마련된 경쟁에서 최종적으로 선정된 기종이 노스아메리칸(North American) OV-10A 브론코(Bronco)였다. 독특한 쌍동 구조를 가진 이 이색적인 항공기는 이후 실제로 베트남 전장에서 활약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