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트 공세 초반, 공산군의 참패

1968년 테트 공세가 개시된 첫 2주 동안 공산군은 약 3만 2,000명이 전사하고 5,800명이 포로로 잡히는 등 실제 투입 병력의 거의 절반에 가까운 손실을 입었다. 같은 기간 남베트남군(ARVN)의 사상자는 2,800명, 미군은 약 1,000명에 불과했다.
공격부대가 목표 지점을 의미 있게 장악한 곳은 후에(Huế)가 유일했으며, 이 때문에 북베트남군은 전과를 확장할 예비 병력을 투입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설 연휴로 병력이 크게 줄어든 상황에서도 최전선의 무게를 짊어졌던 남베트남 민병대와 정규군은 능숙하고 용감하게 싸워냈다. 어느 지역에서도 사이공 정부에 맞선 민중 봉기의 조짐은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미국 정부 관계자들은 이러한 결과를 종합해 공산 세력의 중대한 패배로 판단했다.
전장의 현실과 다른 언론의 그림
그러나 미국 특파원들이 쏟아낸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기사와 TV 영상은 대중에게 정반대의 인상을 심어주었다. 당시 워싱턴포스트 특파원이던 피터 브레스트럽(Peter Braestrup)은 9년 뒤 방대한 자료에 기반한 연구를 통해 이 문제를 상세히 지적하며, 언론이 그려낸 '현실'은 실제 전장의 현실과 크게 달랐다고 결론지었다.
왜 잘못된 보도가 나왔는가
마감에 쫓기는 언론 업무 특성상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오류 외에도, 이번 오해에는 또 다른 원인이 있었다. 적이 대규모 작전을 준비하고 있다는 몇 안 되는 공식 경고를 잊거나 무시한 기자들은, 오히려 가을 선거 운동 기간 대통령이 내놓은 낙관적 발언을 떠올렸다. 웨스트모얼랜드 장군이 1969년부터 미군 철수가 시작될 것이라고 예상한 것은 기자들에게 터무니없는 광기처럼 보였다. 남베트남이 적의 공세에 유린당하는 참상을 목격한 그들 눈에 미국의 철수 계획은 근거 없는 허황된 약속이었지만, 실제로 철수는 1969년에 시작되었다.
더욱이 기자와 방송 해설가 대부분은 전투 경험이 없었고 군사사를 공부한 사람도 드물었다. 그들에게 테트 공세는 믿기 힘든 충격, 뼈아픈 재앙, 미국과 남베트남의 명백한 패배로 받아들여졌다. 패자가 기습 공격으로 승기를 노리는 다른 전쟁의 사례, 즉 1918년의 독일이나 1944년 말 독일의 아르덴 대공세와 비교하려는 시도조차 없었다. 확고한 회의주의에 사로잡힌 그들은 존슨 행정부의 낙관적 발표 뒤에 숨은 기만과 속임수를 폭로하겠다고 마음먹었다. 이는 음모가 아니라 공유된 편견과 오해에 기반한 단순한 집단 반응이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음모와 거의 다름없었다.
카메라가 만들어낸 '폐허'
도시에 입은 피해는 제1·2차 세계대전에 비하면 가벼운 수준이었음에도, 대다수 기자들 눈에는 끔찍하게 보였다. 한 블록의 심각한 피해에 카메라를 고정시킨 TV 취재진은 마치 도시 전체가 폐허가 된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벤째(Bến Tre) 시의 4분의 1이 큰 피해를 입었을 때, 한 기자는 미군 소속 익명의 소령이 남긴 말을 전했다. "도시를 구하기 위해 도시를 파괴할 필요가 있었다." 이 말은 하나의 주제가처럼 반복됐고, 그 파괴의 책임은 도심 한복판으로 전쟁을 끌고 들어온 공산군이 아니라 포격과 항공 폭격을 가한 미군과 남베트남군에게 돌려졌다.
전투의 희생자인 약 7,000명의 민간인 사망자와 약 70만 명의 피난민은 헤드라인을 장식했지만, 후에 등지에서 공산군에 의해 체계적으로 고문당하고 처형된 5,000명 이상의 민간인에 대한 보도는 없었다. 식량과 집을 잃은 민간인들의 처지에 진정한 동정을 보낸 곳은 전쟁에 직접 개입하지 않은 국가들이었다. 대만(중화민국) 정부는 군사 지원(최대 31명의 고문관 파견)에 더해 즉각 물자 지원을 보냈으며, 캐나다와 노르웨이 정부도 지원에 나섰다.
과장된 피해 보도와 에디 애덤스의 사진
특파원들은 후에 황궁이 완전히 파괴되었다고 주장했지만, 실제 피해는 표면적인 수준에 그쳤다. 피해가 경미했던 사이공 역시 TV 화면 속에서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폐허로 그려졌다. 그리고 AP 통신의 에디 애덤스(Eddie Adams)가 촬영한 단 한 장의 사진이 전 세계에 분노를 일으켰다. 사이공 경찰청장 응우옌응옥로안(Nguyễn Ngọc Loan) 소장이 민간인 차림의 베트콩 포로를 근거리에서 권총으로 처형하는 순간을 담은 바로 그 사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