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고르고포타모스 작전: 그리스 저항 세력의 영광과 내전의 그림자

고르고포타모스 작전: 저항 세력의 첫 번째이자 마지막 연합

고르고포타모스 작전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그리스 저항 운동사에서 빛나는 한 페이지로 남아 있다. E.L.A.S.(그리스 인민해방군)와 E.D.E.S.(민족민주그리스연맹)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손잡은 이 작전에서, 영국 장교들의 지휘 아래 그리스에 공수 투입된 160명의 게릴라들이 그리스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철도의 고가교를 폭파하는 데 성공했다.

'고르고포타모스'의 위업은 다른 저항 세력들에게 투쟁의 용기를 불어넣었지만, 동시에 E.A.M.(민족해방전선)으로 하여금 권력 장악에는 반드시 투쟁이 따른다는 사실을 깨닫게 했다. 이 시점부터 추축국 군대에 대한 작전은 후순위로 밀려났고, E.L.A.S. 산하 무장 조직들은 정치적으로 경쟁 관계에 있는 게릴라 집단의 제거에 우선순위를 두었다.

사라피스 대령과 E.L.A.S.의 변모

1943년 3월, 이러한 경쟁 집단 중 하나가 공격을 받았다. 전쟁 전 공화파 쿠데타 가담 혐의로 군에서 좌천되었던 스테파노스 사라피스 대령은 E.L.A.S.의 지휘를 맡는 데 동의했고, 이로써 공산주의자들은 정규 장교의 군사적 지원과 함께 존경할 만한 정치적 명분을 얻게 되었다.

내전의 시작: 특정할 수 없는 날짜

그리스 내전의 시작을 정확한 날짜로 특정하기란 불가능하다. 실제 내전에 앞서 E.L.A.S.와 다른 지지 세력들 사이에 이미 산발적인 유혈 충돌이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43년 9월 이탈리아의 항복은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이탈리아군의 무기와 탄약이 우수처럼 쏟아져 들어오면서 E.L.A.S.는 예상치 못한 호재를 얻었고, 해방이 곧 닥칠 것이란 전망도 함께 손에 넣었다.

10월 12일 무렵, E.A.M.은 라이벌 집단들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개시할 만큼 스스로 강해졌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E.L.A.S.는 모든 경쟁 세력을 분쇄하는 데 실패했고, 오히려 그 행동은 독일군의 저항 운동 진압 공세를 촉발했다. 흥미롭게도 이 공세는 그리스인들 간의 내분을 끝내는 결과를 낳았는데, 이는 독일 입장에서 더할 나위 없이 유리한 성과였다. 결국 여러 게릴라 조직 간의 휴전이 체결되어 1944년 2월 4일 발효되었다.

노선 변경: 직접 대결에서 침투로

공산주의자들은 권력에 도전할 수 있는 모든 세력을 제거하는 데 실패했을 뿐 아니라, 자신들의 진짜 의도와 사용할 준비가 된 수단마저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말았다. 그 결과 그들은 노선을 수정하여 직접적인 충돌 대신 침투 전략으로 방향을 틀었다.

1944년 3월 26일, 이 새로운 노선의 첫 단계로 공산주의자들은 망명 정부에 대항하는 별도의 기구인 '민족해방정치위원회(P.E.E.A.)'를 창설했다. 이 위원회는 E.A.M.보다 넓은 정치 스펙트럼을 대표하는 인사들을 포함했지만, 실질적으로는 공산주의자들이 주도했다. 그들은 공화파와 왕정파 사이의 오랜 알력을 교묘히 활용했다. 일부 그리스인과 영국인은 진짜 문제가 '공산주의자 대 비공산주의자'의 구도임을 간파했지만, 대다수 그리스인은 여전히 정치 투쟁을 낡은 프레임, 즉 공화파 대 왕정파의 대립으로만 바라보았다.

중동 반란과 레바논 회의

이러한 상황이 빚은 결과가 1944년 4월 중동 지역에서 일어났다. 영국 지휘 하에 있던 그리스 육·해군 부대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장교들은 자신들이 P.E.E.A.에 속한다고 선언했다. 이 반란의 여파로 차우데로스 총리가 물러나고 조지 파판드레우가 후임 총리로 선출되었다.

같은 해 5월, 레바논에서 열린 회의에서 파판드레우는 공산주의자를 포함한 각계 정치인들이 모든 지하 저항군을 국민통합정부의 지휘 아래 두고, 그리스가 독립을 회복하는 즉시 자유선거를 실시한다는 내용의 합의에 서명하도록 이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