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페르게르 자유군단(Freikorps de Verger)은 7년전쟁(1756~1763) 당시 프로이센군의 경보병 부족을 메우기 위해 창설된 '자원병' 부대 중 하나로, 1758년 3월에 조직되었다.
프랑스 탈영병으로 구성된 부대
군단은 처음에 5개 중대로 이루어진 단일 대대 형태로 출발했다. 대부분 프랑스 탈영병으로 구성되었으며, 각 중대는 장교 4명, 부사관 7명, 드러머 1명, 머스킷 소총수 140명, 그리고 경보병인 '샤쇠르(chasseurs)' 10명으로 편성되었다. 대대에는 1파운드 경포 2문도 배속되었는데, 1759년에는 화력 보강을 위해 3파운드 포로 교체되었다.
1760년 제2대대가, 1761년에는 제3대대가 추가로 창설되면서 군단은 장교 63명, 부사관 105명, 드러머 15명, 병사 2,250명에 달하는 상당한 규모로 성장했다. 초대 지휘관은 요한 안토니우스 켄칭거 데 페르게르(Johann Antonius Kenzinger de Verger) 소령으로, 그는 1759년까지 부대를 이끌었다.
역사학자가 사령관으로
1759년 5월 26일, 프리드리히 대왕의 친구였던 카를 고틀리프 테오필루스 기하르트(Karl Gottlieb Theophilus Guichardt) 소령이 새 지휘관으로 부임했다. 그는 '퀸투스 이킬리우스(Quintus Icilius)'라는 별명으로 불렸는데, 이는 파르살루스 전투에 참전한 로마 백인대장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었다.
기하르트는 고대 군사사에 남다른 조예를 지닌 인물이었다. 1757년에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전술과 무예를 다룬 저서를 출간했고, 이 책은 프로이센 국왕의 깊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와 관련된 재미있는 일화도 전해진다.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가 격돌한 파르살루스 전투를 둘러싼 공개 토론에서 기하르트는 감히 프리드리히 대왕의 실수를 정정했다. 왕이 해당 전투에 참전한 로마 백인대장을 '카이킬리우스(Caecilius)'라고 언급하자, 기하르트는 그가 '이킬리우스(Icilius)'임을 바로잡았다. 프리드리히는 자신의 오류를 인정하며 "앞으로 너를 이킬리우스라 부르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렇게 군사 역사가였던 기하르트는 어느덧 대대 지휘관이라는 새로운 역할을 맡게 되었다.
그는 1775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군에 복무했으며, 뛰어난 역사적 지식 덕분에 대령 계급에까지 올랐다.
7년전쟁에서의 활약
페르게르 자유군단은 7년전쟁 내내 준수한 전과를 남겼다. 1758년 가을 작센에서 작전을 시작했으며, 프로이센군에게 불운했던 호흐키르히(Hochkirch) 전투에 참전해 큰 손실을 입기도 했다. 이후 실레지아 나이세(Neisse) 포위 해제 작전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명성을 회복했다.
군단은 실레지아 전선에서 계속 싸움을 이어갔다. 1760년에는 제2대대가 프리드리히 대왕이 직접 지휘하는 부대의 일원으로 참전했으며, 특히 드레스덴 다리 전투에서 돋보였다. 이 대대는 배를 타고 엘베 강을 가장 먼저 건너 도시 공방전에 합류하는 수훈을 세웠다.
이후 군단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프리드리히 대왕의 동생인 프로이센의 하인리히 왕자(Prince Heinrich)가 지휘하는 군단에 배속되어 전투를 계속했다. 1763년 전쟁이 종결되자 군단은 해산되었고, 병사들은 프로이센 정규군에 흡수되며 그 역사를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