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이 준이치 – '라바울의 리히트호펜'
사사이 준이치(笹井 醇一, 1918년 2월 13일 ~ 1942년 8월 26일)는 태평양 전쟁 초기에 활약한 일본 제국해군의 전투기 조종사이다. 실제 전선에 나선 기간이 짧았음에도 불구하고 라바울을 중심으로 눈부신 활약을 펼치며 '라바울의 리히트호펜'이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탁월한 지휘관이자 뛰어난 에이스로서 오늘날까지도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생애 초반과 성장 과정

사사이는 1918년 2월 13일 도쿄에서 해군 대위의 아들로 태어났다. 규정 연령에 도달하면 장교로서 군에 입대하는 것이 마치 당연한 운명처럼 여겨졌던 그였지만, 어린 시절은 허약한 건강 탓에 고생이 많았다. 잦은 결석으로 학교에서 급우들의 놀림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강도 높운 운동과 철저한 식단 관리를 통해 건강을 되찾았고, 중학교에 입학할 무렵에는 유도 검은 띠를 딸 수 있을 만큼 몸이 단련되었다. 고등학교 시절의 뛰어난 성과는 그가 에타지마의 해군병학교에 입학하는 데 결정적인 발판이 되었다.
임관과 첫 출격
사사이는 1939년 해군병학교를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했다. 이후 비행 훈련을 시작해 1941년 11월에 과정을 마쳤으며, 그의 불굴의 투지는 '게임콕(Gamecock)'이라는 별명을 안겨 주었다. 일본이 태평양 전쟁에 돌입한 다음 달, 사사이는 이미 타이난 항공대(台南海軍航空隊)에 배속되어 있었다. 그는 12월 10일 필리핀 루손 공습에 이 부대와 함께 출격했으나, 엔진 문제로 인해 중간에 이탈해야만 했다.
첫 승리와 지휘관으로의 성장

필리핀 전역의 승리 이후 타이난 항공대는 네덜란드령 동인도(인도네시아) 지역에서 지상군에 대한 항공 지원 임무를 수행하며 맹활약했다. 사사이의 첫 격추 기록은 1942년 2월 2일 자바 마오스파티 상공에서 세웠으며, 이때 그는 네덜란드군 버팔로 전투기를 격추했다. 18일 후에는 불과 280발의 기관총탄만으로 미 육군항공대 제17추격비행대 소속의 P-40E를 격추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1942년 4월, 사사이는 타이난 항공대 제2비행대(분타이)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그의 부대에는 베테랑 조종사들이 많았는데, 그중에는 훗날 일본 최고의 에이스 중 하나가 되는 사카이 사부로(坂井三郎) 일등비행병조도 있었다. 사카이는 새 지휘관에게 깊은 감명을 받았는데, 다른 장교들과 달리 사사이는 부하들에게 진심 어른 애정을 보였기 때문이다. 사카이는 젊은 소위의 생존을 위해 직접 공중전 기술을 전수했고, 사사이는 사격 실력을 갈고닦으며 훌륭한 에이스로 성장해 나갔다.
눈부신 격추 기록
1942년 5월 4일, 사사이는 P-39 3대로 구성된 적 편대와 교전하여 20분 만에 3대를 모두 격추하며 뛰어난 사격 실력을 입증했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 승리를 거듭한 그는 1942년 8월 7일, 과달카날 상공에서 하루에 무려 5대를 격추하며 개인 최고 기록을 세웠다. 하지만 이 위업은 같은 임무에서 그의 스승 사카이 사부로가 중상을 입으면서 눈물의 흔적을 남겼다. 사카이가 일본으로 후송되기 전, 사사이는 호랑이 문양이 새겨진 자신의 벨트 버클을 선물하며 이것이 반드시 그를 보호해 줄 것이라고 다짐했다.
마지막 출격
8월 26일, 사사이는 과달카날 헨더슨 비행장을 목표로 하는 '베티' 폭격기들을 호위하는 전투기 9대 편대를 이끌고 출격했다. 이들은 목표 상공에서 존 L. 스미스 소령과 리버스 J. 모렐 소령이 지휘하는 미 해병대 VMF-223 비행대의 와일드캣 전투기 12대와 교전했고, 사사이는 이 임무에서 끝내 생환하지 못했다. 나이는 불과 24세였다.
죽음 이후의 평가
죽기 전 가족에게 보낸 편지에서 사사이는 자신의 격추 수를 54대로 적었으며, 제1차 세계대전의 독일 에이스 '붉은 남작' 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의 기록(80대 격추)을 경신하고 싶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해군 통보 제36호에 따르면, 사사이는 타이난 항공대에서 총 76회의 출격 임무를 수행했으며 공인된 격추 수는 27대였다. 그의 모범적인 공로를 기려 사후에 계급이 추서되었다.